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SLPqfQCt0Fo
김재진, 마음의 절
마음이 먼저 가 절을 만난다
더러는 만남보다 먼저 이별이 오고
더러는 삶보다 먼저 죽음이 온다
설령 우리가 다음 생에서 만난다 한들
만나서 숲이 되거나
물이 되어 흘러간들 무엇하랴
절은 꽃 아래 그늘을 길러 어둠을 맞고
문 열린 대웅전은 빈 배 같아라
왔어도 머물지 못해 지나가는 바람은
이맘때 내가 버린 슬픔 같은데
더러는 기쁨보다 슬픔이 먼저 오고
더러는 용서보다 상실이 먼저 오니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한 생은 눈물 같아라
곽도경, 부용
키 훤칠한 꽃 한 송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흙 담장
안간힘으로 받치고 서 있다
태풍 불고 폭우 쏟아지던 한 계절
힘없는 것끼리 안아주고 붙잡아 주며
무탈하게 잘 건너왔다고
서로 어깨 토닥여 주며 서 있다
몇 해 전
암으로 남편 먼저 딴 세상 보낸
내 친구 숙이
그 키만 멀대같은 가스나
어린 두 딸 부둥켜 안고
터지는 울음 목젖으로 넘기며
남몰래 눈물 훔치고 서 있다
그녀 어깨위에
호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장순익, 내가 나에게 안부를 묻다
보내주신 백계동 녹차를
오늘에야 개봉을 했습니다
막연히 함께 나눌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단풍 들고
낙엽 지고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밀어둔 신문 한꺼번에 읽다
손 시린 아침
찻물 끓여 쟁반에 놓고
두 개의 잔을 놓으려다 흠칫했습니다
차 한 잔을 따라
두 손으로 감싸 쥘 때
뜻밖입니다
내가 내 손을 잡아준 지
참 오랜만입니다
덕분에 내게 안부를 묻습니다
녹차 잎이
계절을 모르고
마음 가는 쪽으로 잎 펼쳐갑니다
김충규, 발자국
비 온 뒤의 질척한 산길에 찍힌
사람 발자국이 헉헉
산의 정상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발자국 위에 느리게 내 발자국 놓아보다 혹
이 발자국 저승을 향해 걸어간 이의
마지막 발자국이 아닌가
싶어 숨결이 확 격렬해졌다
순간 휘청, 쓰러지는 나를
곁의 나무가 안아주었다
나는 그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 더 포개지 않았다
겹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찍으며
가끔씩 휙 뒤돌아보았다 혹
누가 내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자국 놓으며 오지 않는지
나를, 저승 향해 걸어간 자로 착각하지는 않는지
한번 달아오른 숨결
쉬이 잔잔해지지 않았다
오봉옥, 시(詩)
어느 날
피투성이로 누워
가쁜 숨
몰아쉬고 있을 때
이름도 모를
한 천사가
제 몸을
헐어주겠다고 사뿐
사뿐
사뿐, 그 벌건 입속으로
걸어 들어온 뒤
다시 하늘로
총총
사라져 간 것이다
그 뒤 난
길에 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다가도
우뚝우뚝
걸음을 멈추곤 하였는데
그건 순전히
내 안의 천사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