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민복,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고영,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
아무 거리낌 없이
강물에 내려앉은 눈발을 맹목적이라고 허공에 쓴다
아픈 기억들을 불어내어 물 위에 놓아주는 강가
무늬도 없는 저녁이 가슴을 친다
하류로 떠밀려 간 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기엔
저 맹목적인 눈발들이 너무 가엷고
내겐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들이
너무 많다
강물에 내려앉은 눈이 다 녹기 전에
아픈 시선 위에 아픈 시선이 쌓이기 전에
바람이 다 불기 전에
상처가 상처를 낳기 전에
너라는 말
자기라는 말
누구누구의 엄마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미안하다는 말
모두 돌려보내자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자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저 눈이 녹아
누군가의 눈물이 되기 전에
다시 하늘로 돌려보내자
후회라는 그 길고 슬픈 말을 배우기 전에
서경온, 주머니가 없는 옷
죽음이란 그래
주머니가 없는 옷
입고 가는 길이지
삶이란 결국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으면 불편해서
가방 메고, 우산 쓰고
가는 길이지
머리가 깨어지게 아픈데도 왜
얼굴이 분해되지
않는 것일까
슬픔으로 가득한 몸인데 어째서
지하철 계단을
잘 내려온 걸까
그러나 이쯤에서
저 타는 노을 빛 한강으로 힘껏
열쇠꾸러미를 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고서
걷고 또 걸어보는
이 밤의 산책이 괴롭지 않은 거다
길이
고마운 거다
이위발, 그림자놀이
당신은 그림자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와
내 가슴에 깊숙하게 드리워 놓고
내보다는 당신 그림자가 더 황홀하다고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보려고 하지만
연꽃보다는 연꽃의 그림자가
대나무보다는 대 그림자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림자는 숲 뒤편에 있고
향나무가 디디고 선 뜰 아래에 있고
강물에 있고 내 마음 속에 있고
그림자 속에 달이 있는데
양금희, 바람은 길을 묻지 않는다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바람의 나이
입이 없어도
할 말을 하고
눈이 없어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모난 것에도
긁히지 않고
부드러운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길을 묻지 않고
지상의 구부러진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