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08.12.17
읽은날 14.09.28
455쪽.
10p.
너무 오래도록 함께 지낸 탓인지 나와 내 남자는 지금까지 대화라는 것을 별로 하지 않았다. 호기심과 흥분으로 충만했던 좋은 시절은 6, 7년 전에 이미 끝나 버렸다. 남은 것은 그저 집요하기만 한 애정 같은 것뿐. 이 사람밖에 없다는 어떤 신앙 같은 확신. 하지만 믿는 신도 의지할 가족도 없는 내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리고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저녁나절의 가로수 길은 비가 내리는데도 오가는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알콩달콩 속삭이는 남녀와 몇 번이나 스쳐 지난다. 이 가운데 과연 얼마나,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이 사람밖에 없다'고 믿고 있을까. 오가는 사람들 저마다에게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빗속에서도 모두가 즐겁게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110p.
무엇보다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멀어져 가는 둘의 뒷모습에서 뭔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담뱃불 같은.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만지면 뜨거울. 그 온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자니 등이 서늘해졌다.
176p.
"뭘 잘 모르는 인간은 이런 소리를 하지. 살인이란 사소한 계기로 선을 넘어 버린 범죄에 불과하므로 어떤 사람의 인생에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는 믿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간도 있거든. 아니, 오히려 그쪽이 대부분이지.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선을 넘느냐 마느냐, 그것은 결국 그 그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185p.
"너는 오시오 할아버지를 죽였고, 나는 다오카 씨를 죽였구나. 이제 우린 똑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중얼거리자, 탁한 두 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하나는 기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응, 그래. 아빠랑 나는 같은 사람이야."
331p.
나는 차림새도 하얗고 소박한 데다 늘 얌전한 하나를 눈과 검은 바다로 덮인 이 동네 경치만큼이나 하잘것없는 아이라 여겼다. 늘 그리다 만 수묵화처럼 부옇고 축축하다고. 그런데 입술만 빨갛게, 저 세상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벌린 입에서 분홍색으로 빛나는 혀가 쏙 나온다. 아이의 혀가 저렇게 끈끈하고 촉촉한 것일까. 미소를 띠고 있는 탓에 준고의 가뭇가뭇한 옆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
딸을 더 원하듯, 혀가 미끈미끈 휘감기는가 싶더니 하얀 사탕이 딸의 입속으로 옮겨 갔다.
344p.
"고마치 언니, 있잖아요, 만약에."
"만약에, 뭐?"
"우리 아빠가 죽인다고 하면, 언니는 어떻게 할 거예요?"
"뭐? 얘는, 당연히 싫지.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라도, 내 목숨은 내 거잖아. 아니야?"
"그렇군요."
하나가 또 뿌듯하게 웃었다.
이 아이는 때로, 정말 섬뜩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아니니?"
"음, 나는, 나는 아빠 거니까, 아빠 손에 죽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
454p.
메마른 바닷바람을 맞으며 손을 더 꼭 잡았다. 그러자 준고도 아플 정도로 꽉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 나는 이 손을 영원히 놓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