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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히 써본 소설 하나 올려봅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3982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버
추천 : 3
조회수 : 38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0/01/25 02:00:00
꽃의 향기가 사라졌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오후의 하늘을 채색하는 어둠처럼, 그것의 소멸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향기를 기억하는 자로써.

이 글을 남긴다.


[환상곡]
[제 1화 - 향기 없는 꽃]


끔찍한 꿈을 꿨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장마철이 다가와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간혹 꾸는 악몽 탓인지, 요즘 들어 아침에 일어나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가슴은 답답하기만 하고, 밤을 새우는 것도 아니면서 피로는 날이 갈수록 몸 구석구석에 쌓여만 간다. 이불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세수라도 할 겸 욕실로 향한다.


"내일부터는 삼십분 정도 더 일찍 자야겠어."


중얼거리며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친 얼굴을 살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다크서클이 희미하게나마 눈언저리에 맴돌고 있었다. 욕실을 나와 식탁으로 간다. 세수를 했는데도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난 식탁 의자에 대충 늘어져 앉았다. 부엌 쪽에서 나보다 10분정도 일찍 일어난 엄마가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휴우, 엄마도 피곤하겠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선 둘 곳을 찾는다. 문득 며칠 전에 들여온 꽃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부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하이얀 화분에 담긴, 바알간 장미를 향해 조심스레 코를 가져다 댄다. 역시나, 오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평일 아침은 항상 바쁘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신발을 신고 있으니.


"우산 가져가라. 엄마 오늘 모임 있어서 비와도 너 데리러 못가니까."


가방에 우산이 있던가? 기억이 안 나네. 모르겠다. 있겠지.


"챙겼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새벽이나 다름없이 이른 아침의 거리는 언제나 평화로우면서도 언제나 고요하다. 잠이 덜 깨어 더욱 무거운 두 다리를 이끌고 학교로 향한다. 보통 걸음으로 대략 30분정도 걸리는 거리.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10분 정도 단축이 된다. 이번엔 부디 제시간에 교문에 입성하기를 빌며, 그 10분에 희망을 걸고서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쯤 걸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자마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가 살풋 서늘해진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갖 자질구레한 냄새들이 바람에 실려 코로 서서히 스며들어온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임을 암시하는 빗물 비린내, 침샘을 자극하는 갓 구운 빵과 과자 냄새, 가로등 아래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쓰레기 냄새. 하지만 그 어디에도 꽃내음은 없었다.


"늦겠네."


되뇌이며 다시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괜한 짓을 했을까. 이젠 익숙해 질 때도 되련만.


신의 도움으로 선도부 선생님께 이끌려 운동장을 도는 일은 없었지만 급하게 뛴 탓에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휴지 좀 빌려주라. 어, 고마워, 아니 한 장만 더. 새로 산 휴지를 내가 처음으로 썼다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친구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난 휴지를 반으로 접어 땀을 닦아내었다. 음? 그런데 이 위화감은 뭐지? 땀 냄새에 섞여 휴지에서 야릇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의아함에 휴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추임새가 들어온다.


"그거 부드럽지? 요 앞 마트에서 산건데 괜찮더라고."


"그래그래."


씨익 웃으며 땀에 절은 휴지를 버리러 일어섰다. 착각이겠지. 보나마나 화약 약품이다. 꽃의 향기는 죽었다. 


"야, 곧 종치겠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녀석은 말을 마치기 바쁘게 화장실로 급히 걸어갔고,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시작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나긋하게 흐른다. 시험은 진작 끝나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 있는 터라 수업은 귓가를 맴돌기만 한다. 자연스레 나른해진다. 생각 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몇 번 졸고,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모두가 염원하는 종례시간이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히 계세요. 가방을 챙겨 교실 문을 나서려는 찰나에 누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날 보고 싱긋 웃은 후에, 그 누군가는 말했다.


"이제 방학도 일주일 남았냐? 벌써 중학교도 반년밖에 안 남았네."


오전에 휴지를 건네주었던 녀석이다. 이놈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단 말이야.


"그러게. 아무튼 난 갈게."


"쳇, 싱겁기는. 잘 가라."


잘 가라고 대충 손을 흔들어 준 뒤, 나는 잽싸게 교문을 나섰다. 팔다리가 쑤시고 하늘이 우중충 한 게 비가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듯하다. 우산이 있나 가방을 뒤져본다. 허나 우산은커녕 MP3 플레이어마저도 학교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내 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들었다.


볼에 차가운 것이 부딪혔다. 빗방울이다. 하늘은 진회색의 구름들로 덮여 있었다.


"이런 젠장, 한바탕 퍼부을 거 같은데. 집까지 달려야하나?"


투두둑, 투두두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가 쏟아져 내린다. 진한 소나기 냄새. 아무래도 조금 내리다 마는 소나기로 생각되었기에 난 잠시 비를 피하려 길가의 어느 허름한 가게의 지붕 아래에 몸을 기대었다.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이것저것 건드려 보아도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마땅히 전화할 곳도 없었고 문자를 보낼 곳도 없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우산 가져가라. 엄마 오늘 모임 있어서 비와도 너 데리러 못가니까.' 아침에 들었던 엄마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만두자.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


무심결에 들이마신 껄끄러운 숨결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일이 기억을 비집고 들어왔다. 세상에서 꽃의 향기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을 때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철저히 무시당했다. 꽃에는 향기 따윈 없다고. 나도 잊으려 했다. 허나 쉽지 않았다. 머리가 아닌, 심장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보다 빗줄기가 굵어 보이는데. 기분 탓일까.


"거기 학생, 옆으로 좀 비켜주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갑작스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조심스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한 예순 살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날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는 매우 귀찮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자네 발 옆의 꽃을 안으로 들여놔야 하거든."


"에? 네. 엇 차거."


이게 무슨 꼴이지. 할아버지가 내 발치의 꽃 화분을 가리킴과 동시에 난 두 걸음이나 물러섰고 지붕이 워낙 좁았던 덕분에 소나기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난 조금 머뭇거리다가 다시 지붕 아래로 몸을 옮겼다.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아래를 본다. 아기자기한 꽃 화분들이 바닥에 튀기는 빗물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허름한 건물이 꽃집이었구나. 간판 이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몰랐군. 저걸 어떻게 읽더라?


"무, 무, 무춘......"


"'무춘(無春)'이 아니라 '무향(無香)'일세. '무향화(無香花)'. 향기 없는 꽃 이란 뜻이지."


할아버지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뛴다.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눈앞이 아찔하다.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내 입이 뭔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입이 지껄이는 한마디는 나와 할아버지 모두에게서 이질적인 반응을 도출해 내었다.



---


할아버지의 눈매가 일순간에 매서워졌다가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그는 날 쳐다보다가 이내 허리를 굽혀 자그마한 화분 하나를 집어서 건물 안으로 들여놓았다. 내 질문을 회피하는 건지, 아니면 무언의 대답을 말하고 있는 중인지 어느 쪽이건 그다지 상관은 없다. 어쨌거나 난 지금 무시당하는 중이니 말이다. 오기가 붙는다. 난 여전히 무관심 일색인 할아버지에게 방금 했던 질문을 더욱 명확한 어조로 재차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던진 돌멩이는 꽤 그럴듯한 파문을 일으켰기에 물결이 내 발치에까지 다가왔다.


"그건...... 우선 이것들을 전부 집 안으로 들인 뒤에 생각하기로 하지."


"도와드리죠."


왠지 이 할아버지라면 그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던, 아니, 여타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었을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벅지까지 올 정도로 크고 무거운 화분을 두어 개쯤 낑낑대며 처마 밑으로 밀어 넣고 나니 주변이 대충 정리가 되었다. 화초들이 심어져 있지 않은 자잘한 화분들은 그대로 빗물을 받아내도록 두기로 하고서,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향기 없는 꽃> 이란 이름의 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느낌의 화원이었다.


"그래. 지금 기분이 어떤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난 겉으로 드러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워졌다. 무슨 뜻이죠? 얼떨떨하게 묻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잡생각을 버리라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직한 한마디를 한 뒤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 할아버지의 말대로 잡생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생각보다 어렵다. 잡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부풀어 오히려 생각의 서랍장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 해도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각들이 불어나고, 불어난 생각들은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더욱 거대한 생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요."


할아버지는 혀를 찬다.


"자네에게는 너무 어려웠나 보군. 그럼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쉬어 보게."


누가 들었어도 어려웠을 테지. 어쨌거나 나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온몸이 아찔해 지는듯한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몸 구석구석에 돋아난 소름이 잠잠해지고, 하얘진 머릿속이 원래의 색을 찾고 난 후에서야 난 천천히 할아버지를 돌아봤고 그는 이마의 주름살만큼이나 깊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난 잘 모르겠는걸. 그보다, 비가 거세어졌군."


"말도 안 돼. 이건 마치......"


사라졌던 꽃향기가 돌아오기라도 한 겁니까?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것은, 코를 가득 메워오는 달콤한 꽃의 향기들 때문이기도 했고,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격한 감정에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화원에서 자라는 꽃들은 모두 향기를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끝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흥분감에 다리가 떨려오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이 화원의 꽃들을 잔뜩 싸들고 나가서 집과 학교, 학원, 아니, 내가 아는 모든 장소에 뿌려버리고만 싶은 기분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래야만 했다. 지금은 꽃향기가 사라진 이유를 알아내는 일이 더욱 시급하니 말이다.


"우선은 여기 앉게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의자 두개를 집어 들고 온 할아버지는 그중 하나에는 자기가 앉고 나머지 하나를 내게 건넸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의 질문이 들어왔다.


"재미있지 않나?"


"뭐가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솔직히 말하면 전혀 재미없어요."


할아버지는 뭔가 말하려다 멈추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아니야. 나중에 말하기로 하지. 그건 그렇고 꽃에서 향기가 사라진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지?"


"네."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디보자...... 원래 꽃에는 향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사라져버렸다고? 허어, 그것 참 이상하군 그래."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말이 거짓이든지 진실이든지 간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기에 할아버지는 상대방의 방해 없이 말을 끊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런데 꽃에 향기가 있던가? 나이를 먹으니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아니지. 그러고 보니 꽃에는 원래 향기가 없지 않나?"


이건 또 뭔 소리냐. 봉창은 자다 깨서 두드리라고 있는 게 아니다. 끼어들지 말자는 다짐은 취소다. 도저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잖아.


"슬슬 학원에 가봐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요."


공손과 짜증이 절반씩 섞인 말투였다.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잖은가. 벌써 가려고?"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구요."


툭 내뱉은 말에는 온화하던 분위기를 순식간에 차갑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쉽사리 입을 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난 애써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말을 심하게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이 작자가 한번만 더 딴소리를 지껄이면 정말 가버리겠어.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침묵을 흐트린 쪽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방이었다.


"이 늙은이가 장난이 너무 심했군. 허나 그렇게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공자는 욕속부달(欲速不達) 이라고 했지. 어떤 때는 돌아가는 게 더 좋은 법이야. 떠올려 보게. 언제부터 향기가 모습을 감췄는지를.


할아버지의 말은 느긋했다. 때문에 난 그가 하는 말을 착실히 되씹으며 기억의 문을 열 수가 있었다. 꽃의 향기가 사라진 시점을 정확히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 말대로 꽃은 애초에 향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슴이 시렸다. 보도블록 사이에 수줍게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볼 때도, 연인을 앞에 두고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의 손에 들린 붉은 장미를 볼 때도, 묘비 곁에 숙연하게 놓인 하얀 국화를 볼 때도. 원인을 모르는 쓸쓸함이 가슴을 적셔 들어왔던 것이다.


"찬찬히 차오르다가 어느 순간 넘쳐흐르는 물처럼, 이 망각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것이지."


생각의 틈 사이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는 손바닥만한 화분을 내게로 내밀어 보였다. 화분 안에는 거무튀튀한 흙이 담겨져 있었고, 엉성하게 다듬어진 흙 위로는 자그마한 화초 한 점이 얹혀 있었다. 아담하지만 매끈하게 뻗은 줄기 위에는 아기의 손처럼 보이는 잎사귀, 잎사귀 위에는 너무나 연약하기에 오히려 순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다섯 개의 새하얀 꽃잎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모데미풀이야.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야생화라네. 독초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잇거든. 이 가녀린 꽃은 무슨 색의 향기를 품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독초라는 말에, 꽃에게 가져가던 손을 얼른 거둬들인다. 할아버지는 흙 한줌이라도 떨어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모데미풀 화분을 내게 건넸다. 아름다운 모양만큼 향기도 아름다울까? 할아버지에게서 화분을 건네받은 나는 모데미풀에 천천히 코를 가져다 댔다. 방금 전에 느꼈듯이, 이 화원 안에 있는 꽃들은 아직 향기가 살아있다. 기대하며 숨을 들이마신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신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젠장.


"어째서 느껴지지 않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어느 추측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쾌한 추측은 늘 들어맞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꽃향기들이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당혹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날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다소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역시 그랬구먼. 자네도 나와 같아. 이제야 확신이 드네."


"무슨 말씀이시죠?"


"자네를 시험해서 미안하네. 이런 방법 밖에는 생각나질 않았어. 무례를 용서하게나."


난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 마음을 이해하네. 세상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일들이 여럿 있기 마련이야. 그리고 진실을 아는 이들은 대게 소외되곤 하지."


할아버지의 눈빛은 엄숙했다. 이유모를 기분에 또다시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나오고 있었다.


"세상의 꽃들이 향기를 잃은 그 날, 하늘의 뜻이 자네를 선택했네."


입술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말해주겠네. 그리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걸 느끼며, 심장박동수가 비약적으로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자꾸만 떨려오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할아버지의 한 마디를 기다린다. 모든 사물이 멈춰버린 듯 한 이 공간 안에서, 마침내 그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향기를 기억하는 자여."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


할아버지의 등 뒤로 절반쯤 열린 창문이 보인다. 하늘이 어둡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가 아닌 건가. 집에는 어떻게 가야하지?


"어디 아픈가?"


음울한 분위기 탓일까, 잠깐 현기증이 도진 탓에 이마에 손을 얹자 할아버지가 묻는다. 아니라고 손짓 한 뒤에 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향기를 기억하는 자라니, 거창한 수식어는 관두세요."


말하고는, 잠시 숨을 돌린다. 태연한 척 하는 것도 힘들군.


이 성질 괴팍한 노인의 입에서 다음에는 또 무슨 망발이 튀어나올지 모를 긴장감에 그런 건지,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쓰고는 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몇 번 지껄인 다음에 난 말을 이었다.


"향기를 되찾는 방법이 뭡니까?"


"자네는 삶을 여유롭게 사는 방법을 좀 배워야겠군."


"말 돌리지 마시구요."


할아버지는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잠시 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자네가 절박하다고는 해도,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하나하나 새겨들어야 할 일일세."


정색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거절은 무리인 듯 했다. 알겠습니다. 들어보도록 하지요. 난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겨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네에게 '향기를 기억하는 자' 라고 했었지.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야. 그 말 그대로지. 꽃의 향기를 기억하는 건 자네 뿐이니까. 자네가 옳아. 꽃에는 필시 향기가 있었겠지. 허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건 의외다.


"향기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네. 느껴지지 않는 다기 보다는 온몸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네. 하지만 나라면 자네를 다른 이들보다는 좀 더 이해 할 수 있지. 왜냐하면 나도 자네와 같은 경험을 겪었으니 말일세."


난 놀라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말을 잇는다.


"내 경우에는 '김' 이었어."


"먹는...... 김 말씀이세요?"


할아버지가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물을 끓일 때 생기는 김 말이네. 아무런 표식이나 신호도 없었어. 평소처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알아챘다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된 거야. 마치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끓고 있는 주전자 위로 희뿌연 김이 피어오르지 않고 있었다네."


저와 같으시군요. 라고 하려다가 말을 거둬들였다. 할아버지가 약간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알겠지. 아무리 말해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 기분을."


난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다. 몇 초 전에도 느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절망에 빠진 늙은이의 앞에 그 아이가 나타났네."


"아이 라구요?"


"열세 살 정도 되었을까 하는 여자아이였지. 수선화의 꽃잎처럼 노란 머리카락과 푸른 보석같이 짙푸른 눈동자를 지녔었어. 생각해보니 서양사람 이구먼. 그 아이는 날 보더니 대뜸 내게 말했네. '기억의 끝에 진실이 있다. 사명을 다하라.' 라고. 아직도 그 일이 믿겨지지가 않아. 마치 꿈과 같았네. 그 아이가 하는 말은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글을 쓰는 것 같았거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는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더군."


기억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 둘 중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자의 등장이었다. 난 진위를 따질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고, 할아버지는 다시금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었다. 


"사명을 다하라니. 대관절 무슨 뜻인지 짐작도 안가더구먼. 난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 을 '생각' 하는 것뿐이었네. 내가 봤던 모든 것을, 들었던 모든 것을, 느꼈던 모든 것을. '사명' 이 무엇을 요하는지도 모른 채, 난 그저  캄캄한 방 안에 틀어박혀  내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 그렇게 일주일정도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거기까지 말하고 목이 마르는지 말을 멈췄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났네."


심장에 문이 달려있다는 의견에 대해, 지금까지는 추측이었으나 마침내 증거를 발견했군. 가슴 속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쏟아진다.


"누구냐고 물어볼 생각마저 하지 못했다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네. '사명은 끝났다. 향기를 찾아가라.' 라고. 그 순간 눈앞이 밝아지며 정신이 맑아졌어. 흔히들 '각성(覺醒)' 이란 말을 쓰곤 하지. 내가 그 각성이란 것을 했었는지도 모르겠군. 사라졌던 김이 내 눈과 다른 이들의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날도 바로 그 날 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누구도 말해주진 않았으나 나는 나 스스로가 '기억하는 자' 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그러고 나서 저를 만나신 거군요?"


"맞아. 향기를 찾아가라니, 이 무슨 얼토당토 않는 말인가. 헌데 궁하면 통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더군 그래. 고심하던 차에 자네가 찾아왔으니 말이야."


말한 뒤,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제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빗줄기는 잦아들었다. 빗방울이 다시금 굵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는 게 현명하리라.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반드시 들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 여자아이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일말의 기대를 걸고서 물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시나요? 하고 묻자 그는 날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풀어야 할 자물쇠지. 내 것이 아니라네. 내 역할은 이걸로 끝났으니까. 허나 명심하게. 자네가 원하는 한 꽃의 향기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올 거야. 왜냐하면......"


덧붙이는 말 대신 할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자연스레 침묵이 찾아온다. 우리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창문으로 가져갔다. 하늘이 밝아지고,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조금 더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대화를 나눈 시간이 꽤 되었는지 일어나는데 다리가 살짝 떨렸다.


"슬슬 가봐야겠네요.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 같은 건 없다네. 남이 불러주지 않으면 쓸모없는 이름이야. 자네도 굳이 밝힐 필요는 없어. 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는 게 우리네 삶이니. 그럼, 잘 가게."


만남과 달리 헤어짐의 과정은 길지 않았다. 가볍게 인사한 뒤 화원을 나왔다. 옅은 구름 사이로 흘러내리는 수백가닥의 빛줄기들이 바닥에 고인 빗물을 눈부시게 비춤으로써 소나기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떼었다. 뭐랄까,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지도에 적힌 기호중 하나를 해독해낸 기분이라는 비유를 들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화원에서의 문답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었으니까.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편지 모양의 아이콘이 화면 가운데에 떠올라 있었다. 늘 그렇듯이 무신경한 동작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네뒤에있어]


발신인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


"너구나. 향기를 기억하는 자."


푸른 보석을 품은 가녀린 수선화 한 송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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