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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43UQyKUYe4
황학주, 좀 떨어져 있는 편, 가을은
상을 받아두고
마루 끝에 앉는다
가지 끝에
얼룩 송송 난
곱다래진 떡갈나무 잎
그러한 빛에 앉았다 가라는 것 같이
물든다 가을은
오래된 집을 나온
마음의
휘청, 하는 마음에
살고 있는 듯
떡갈나무 잎 하나
마루 끝에 내려앉는다
괜히 슬픈 거완 거리가 다르다
좀 떨어져 있는 편이다
가을은
이자규, 오징어 만장
나무와 나무 사이의 배경을 물고 나부끼는
영덕 오십천 길로 괴시리 마을 목은 선생이 먼저 갔다
저 끝에서 복사꽃 잎들은 줄지어 바다로 갔다
꽃잎 떠난 자리 축축한 피멍, 소리 없는 울음에
복숭아 향기를 암송하는 사람들
비워져서 넓혀져 간 강바닥 중심에
굵은 심줄을 거머쥐고 가는 길
오징어 꿰미 대소쿠리 이고 적삼 겨드랑 속 젖물렸던 청상은
먼저 보낸 자식 놈 찾아간 구중궁궐 속 짐은 내려놓았을까
헤엄쳤던 세상 나외서야 곧은 자세가 되는
뼈대 찾아 제 몫을 다하는 것처럼
배를 갈라 사열한 채 허공을 유영하는데
저 신비롭고 숭고한 행렬
때 묻은 나를 씻어 말린 적 없어 오던 길 힐끗 돌아본다
절벽 아래 무수한 언어들이 따라온다
황은주,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권현형, 물과 싸우다
막걸리를 마시다가 당신은 하루 종일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결국은 싸움인데, 싸움에서 지면 안 되는데
진흙 속에서 싸우는 것보다 물과 싸우는 건 어렵다
물이 묽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무장 해제된 채 흘러 다니므로 아픈 줄도 모르고
당신은 끊임없이 죽어가거나 끊임없이 살아날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은 후 심장이 하나 더 생겼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 슬프면 배가 뜨끈해진다
복부 쪽으로 흐르는
눈물의 임파선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이제 물과 싸울 자신이 생겼다
11월, 춘천, 바슐라르의 물의 상상력이
희미하게 언급되는 밤, 감정의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름 속에 희미한 별 무늬가
상흔처럼 찍혀 있다
나는 피가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수면 아래로
김정환, 철길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 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 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