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일, 가을 앞에서
이젠 그만 푸르러야겠다
이젠 그만 서 있어야겠다
마른풀들이 각각의 색깔로
눕고 사라지는 순간인데
나는 쓰러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사라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높푸른 하늘 속으로 빨려 가는 새
물가에 어른거리는 꿈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김기연, 가시 눈물
탱자나무 눈은
가시다
한 때 저 눈이 피어내던 소란한 흰 꽃
그 꽃자리에 매단
단란한 등
등 바람
풀 수 없는 경계의 눈 젖고 있다
난무한 숲
속속들이 부풀리고 있다
잿빛 허공에 맺혀
그렁대는 생각
어제 혹은 내일
그대에게 걸린
시린 내 맘처럼
고영민,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그동안 저 가지를 지그시 물고 있던 것은
모과의 입이었을까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나무는 저 노랗고 둥근 입속에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부드러운 혀였을까
입김이었을까
가진 것 없이 매달린 내가
너에게 오래오래 가닿는 길은
축축하고 무른 땅에 떨어져 박히는 것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거부해도 네 입속에 혀를 밀어넣듯
다시 혀를 밀어넣듯
김경후, 입술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 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
노을 끝자락
강바닥에 끌리는 소리
네가 아니라
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검은 수의 갈아입는
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 겹 주름진 절벽일 뿐
전다형, 그리움은 입이 크다
어리석은 딸이 바닷길 열고 지구 반대편으로 어학연수 떠난 사흘간
고삐 잡힌 마음이 말뚝도 없던 전화기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전화기가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내 목을 칭칭 감았다 풀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근황이 그믐으로 깔리던 나흘째
물 젖은 안부를 입에 문 나비 모양의 전화기가 나를 꿀꺽 삼켜버렸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잘 지낸다는 말 한 마디가 힘이 세었다
전화기가 내 손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한시름 놓는 눈치였다
꼭꼭 얼어붙은 몸을 푼 봄 햇살이 집을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