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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고향에 와서
아내는 눈 속에 잠이 들고
밤새워 바람이 불었다
나는 전등을 켜고
머리맡의 묵은 잡지를 뒤적였다
옛 친구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고 부끄러웠다
미닫이에 달빛이 와 어른거리면
이발소집 시계가 두 번을 쳤다
아내가 묻힌 무덤 위에 달이 밝고
멀리서 짐승이 울었다
나는 다시 전등을 끄고
홍은동 그 가파른 골목길을 생각했다
유병록, 두부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뜻한 살갗 안쪽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최은묵, 밤 외출
문 없는 방
이 독특한 공간에서 밤마다 나는
벽에 문을 그린다
손잡이를 당기면 벽이 열리고 밖은 아직 까만 평면
입구부터 길을 만들어 떠나는
한밤의 외출이다
밤에만 살아 움직이는 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문을 닫고 잠들었다
나도 엄마 등에서 잠든 적이 많았다
엄마 냄새를 맡으며 업혀 걷던 시절엔
갈림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
나의 발은 늘 여유로웠다
어둠에서 꿈틀대는 벽화는 불면증의 사생아
내가 그린 길 위에서 걸음은 몹시 흔들렸다
걸음을 디딜수록 길은 많아졌고
엄마 등에서 내려온 후로
모든 길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열린 벽, 문 앞에 멈춰 냄새를 맡는다
미리 그려둔 여름 길섶
펄럭 코끝에 일렁이는 어릴 적 낯익은 냄새
오늘은 그만 걷고 여기 가만히 누워
별을 그리다 잠들 수 있겠다
하늘에 업힌 밤
오랜만에 두 발이 여유롭다
이기철,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나무의 생각이 그늘을 만든다
그늘을 넓히고 좁히는 것은 나무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나무는
나무가 뻗고 싶은 곳으로 가서 그늘을 만든다
그늘은 일하다가 쉬는 나무의 자리다
길을 아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서 제 지닌 만큼의 자유를 심으면서
나무는 가지와 잎의 생각을 따라 그늘을 만든다
수피 속으로 난 길은 숨은 길이어서 나무는
나무 혼자만 걸어 다니는 길을 안다
가지가 펴놓은 수평 아래 아이들이 와서 놀면
나무는 잎을 내려 보내 아이들과 함께 논다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그늘
그늘은 나무의 생각이다
김연대, 손톱 깎는 아침
떠나지 전 미처 깎지 못 한 손톱
떠나서도 이래저래 깎지 못 한 손톱
돌아와서 깎는다
딱딱한 사고 쭈그러진 생각
쓸 데 없는 너스레 웃자란 사치
실제로는 나 아닌 가식의 것들
돌아와 다소곳이 앉아
고개 숙여 잘라낸다
오만과 편견
때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