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1월 4일 아침 학성산 조·명연합군 수뇌부 진지
“왜 이리 굼뜨게 움직이는 게냐? 어서 서둘러라!”
경리 양호의 부관이 그의 짐을 수레에 옮기는 인부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미 연합군 수뇌부 진지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양호의 퇴각명령이 전해지자 명군 안에서의 동요가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진지 밖에서는 왜적의 구원군 본대가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총병 오ㅇㅠㅊㅜㅇ등이 이끄는 부대는 태화강 북쪽의 언양 등지에서 오는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본대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여서 상황전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 실었는가?”
갑주를 제대로 챙겨 입는 양 경리가 부장을 불러 후퇴준비가 모두 끝났는지 물었다.
“이것만 적재하면 끝납니다. 경리 각하. 장군께서도 서둘러 말에 오르시지요.”
“음…. 알겠네.”
양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선 자신의 종자의 등을 밟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다시 부관을 불러 세웠다.
“참. 장 대인은 어찌 되었는가? 오늘 오전에 보이지 않던데….”
“그는 이미 자신의 상단을 이끌고 금일 새벽에 조용히 빠져나갔다 합니다.”
“그런가.”
양 경리는 장 대인의 이른 도주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전방에 보이는 도산성을 잠깐 노려보다 경주로 길을 잡았다. 적의 전면공세를 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양 경리 각하. 소장 등을 두고서 어디로 가십니까?”
경리의 행차 길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불한당이 양손을 쭉 뻗어 길을 막아섰다. 유격장 파새였다.
“파 유격. 내 참장 양등산과 함께 그대를 본대의 후미를 방어하는 중책을 맡겼거늘…. 여기서 뭐하는 것이오?”
“저를 다시 선봉장으로 임명해주시어 다수의 정예병을 딸려주신다면 저 무도한 원숭이들을 확 쓸어버리겠습니다. 각하”
양호는 마상에서 혀를 끌끌 차며 버럭 화를 내었다.
“쯧쯧. 내 놈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천하디천한 미관말직 주제에 어디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의 명을 거역할 심산이냐? 당장 비켜라!”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제 요구조건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여기에 누워서 버티겠습니다. 경리께선 한 발짝도 못 가십니다.”
양호의 앞길에 아예 대짜로 들어 누워버린 파새였다. 양 경리는 부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이게 놔라! 양 경리! 경리 각하!”
“퍽”
“자. 어서 가시지요. 갈 길이 멉니다. 장군”
부관과 그의 수하들이 말에서 내려 난동을 피우는 그의 사지를 붙들고선 둔기로 머리를 때렸다. 순간 정신을 잃은 파 유격은 맥없이 쓰러졌다. 그런 그를 부하들은 길 가장자리로 던져버렸다. 경리는 말을 몰아 전진하면서 수풀에 버려진 유격장 파새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무식한 놈은 어쩔 수가 없구먼. 누울 자리를 보면서 다리를 뻗어야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공명을 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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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같은 시각. 휑한 아동포살수대 진지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살수대 대장인 여여문과 초관 최산이였다. 그들은 아군의 전초기지를 심야에 습격한 적의 원군을 막는데 투입되었다가 이제야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온 것이다.
“살수대원들은 도원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제1선으로 퇴각했으니 이제 이곳은 우리만 남았구나.”
“예. 스승님. 제가 울이를 찾아 갈 터이니 어서 학성산 진지로 가십시오.”
“아니다. 내가 그 아이를 데려가마. 네가 더 날래니 어서 접반사 대감에게로 가라.”
임무배분을 두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그들이었다. 도원수 권율은 접반사 이덕형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들에게 이덕형에 대한 호위 임무를 맡겼다.
“알겠습니다. 그럼 학성산 밑의 서낭당에서 뵙겠습니다. 스승님”
“오냐. 전에 만났던 그곳에서 보자꾸나. 속히 가라.”
여여문은 손짓을 하며 그를 재촉했다. 산이는 여대장의 손에 들린 짚 끈으로 엮은 머리 세 개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그 수급은 어찌하실 겁니까?”
“이건 내가 가지고 가야 한다.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자세한 얘기는 성황당에서 해주마.”
“예. 그럼. 울이를 꼭 좀 부탁드립니다.”
곧 적군이 이곳까지 몰려올 화급한 상황에서 제자는 웃음기가 전혀 없는 진지한 모습으로 스승을 뒤로 한 채 학성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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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이야. 안에 있느냐?”
여여문은 단숨에 울이가 있는 막사까지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군막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황이 없으니 내 실례하마.”
여대장이 거칠게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는 정신이 혼미한 울이가 얕은 신음을 내며 누워 있었다.
“울이야. 정신 차리거라. 정신. 응?”
그는 울이의 침상으로 달려가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여문이 울이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리로 약해진 몸에 고뿔도 함께 걸린 것이 분명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가냘픈 숨소리가 그녀의 안부를 대신 해주고 있었다.
‘하는 수 없군. 일단 이 아이를 업고서 산이에게로 간다.’
“끙차”
여대장은 거추장스러운 왜검을 놔두고 품 안에 단도 하나만을 챙긴 뒤에 가지고 있던 수급을 다시 한 줄로 꿴 다음에 그것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쓰러진 울이를 자신의 등에 업고선 막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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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2주 전에 왔었던 서낭당은 그 모습 그대로 황폐한 상태였다. 울이를 업고서 산길을 넘어 산 중턱의 이곳까지 올라온 여여문이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 산이와 접반사 일행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울이야. 울이야 제발 정신을 차려 보아라. 응?”
여대장은 짚이 깔린 바닥에 눕힌 울이의 양 뺨을 때리면서 그녀를 깨우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요지부동인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미동 없는 울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는 수 없군. 용서해라. 울이야.”
그는 아무런 대답 없는 그녀에게 혼잣말로 동의를 구하고선 그녀의 무명솜옷의 윗도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곤 그녀의 가슴을 압박하고 있던 꽁꽁 묶어져 있던 헝겊을 훌훌 풀기 시작했다.
“이러면 답답함이 좀 가실 것이다.”
잠시 후. 헝겊쪼가리에 감추어졌던 그녀의 뽀얀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봉긋봉긋하게 솟은 것이 작은 무덤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끼익”
성황당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여대장은 문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산이냐?”
“조선말…. 들린다….”
그의 기대와 달리 명의 갑주를 입은 커다란 사내가 들어왔다. 남자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파 유격 아니오?”
“누구? 아…. 여여문이다. 항복한 왜놈….”
유격장 파새는 비틀거리며 서낭당 내부로 들어왔다.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짚은 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명군은 벌써 퇴각하지 않았소? 무슨 사연인 줄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나가 주셨으면 하오.”
여여문은 울이의 풀어헤쳐 진 옷을 재빠르게 수습하며 파새에게 나가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음…. 머리 아파….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응? 이 아이는…. 전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역시…. 계집? 허…. 저건 왜놈 머리….”
“무슨 말씀이시오. 어서 밖으로 가시오. 이곳에 오기로 한자는 따로 있소.”
여대장은 재차 퇴거를 명했다. 하지만 파새는 음흉한 미소를 띠면서 그에게 섬뜩한 제안을 했다.
“흐흐흐…. 저 어린 계집…. 그리고 머리 다 내 것이다. 너 나가…. 아니면 죽인다….”
“수급도 이 아이도 포기할 수 없소. 피를 보고 싶지 않거든 어서 떠나시오.”
여여문은 그의 말에 반발하며 품속에 있던 단도를 뽑아서 일어섰다.
“그깟 단검…. 상대 안 돼….”
파 유격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여대장을 견주었다. 작은 서낭당 안에 큰 긴장감이 일순 돌고 있었다. 두 남자 사이에 누워 있는 울이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모르는 채 혼절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