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교수들의) 말씀은 부드러웠지만 논조는 강하였다. 명령이었다.”
일제 식민사학 극복의 초석을 닦은 역사학자로 평가받는 김용섭(80·사진) 전 연세대 교수가 최근 낸 회고록에서 서울대 교수 시절 자신의 사관을 둘러싼 동료 교수들과의 갈등으로 서울대를 떠났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조선후기사회의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등을 주창해온 김 교수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담은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지식산업사)에서 1975년 16년간 봉직했던 서울대를 떠나 연세대로 옮긴 배경으로, 해방 뒤 친일 전력에도 국내 역사학계 1인자로 군림한 이병도(1896~1989) 전 서울대 교수와 그를 따르는 동료 교수들과의 알력을 지목하며 당시 비화들을 공개했다. 특히 1966~1975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일하던 때는 “연구활동이 절정기”였고, 당시 이병도가 이끌던 주류 실증주의 역사학(문헌, 유물 고증에 바탕한 역사학) 등을 성찰·비판하는 학술운동을 펼치며 적극 발언에 나섰던 시기였다. 이런 활동이 다른 학자들 반발을 불렀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보면, 동료였던 고 김철준 교수는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아”라고 했고, “이○○(이병도)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를 각각 경고성 발언과 절교성 발언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고 한우근 교수는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라고 말했다고 썼다. 김 교수는 이런 교수들의 지적들을 ‘명령’으로 보고 서울대를 떠날 결심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자신의 강의 시간에 임나일본부설 등 식민주의사학을 제창해온 일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전 경성제대 교수)가 참관을 요청한 일도 떠올렸다. 스에마쓰의 제자였던 고 김원룡 교수가 찾아와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식민주의 청산을 주창했던 김 교수에 대한 ‘은밀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다. 식민주의 청산운동을 주창하던 김 교수에겐 굴욕적인 일이었다.
한편 김 교수는 12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식민주의 사학이 극복됐다는 사람도, 극복되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서로 다른 학문적 경향들이 하나의 ‘한국사학’을 만들기 위한 과정 속에 함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회고록 출간의 소회를 밝혔다. 서울대 역사교육과의 한 교수는 김 교수가 책에 공개한 내용에 대해 “당시 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세였다. 교수들 간에 입장이 갈릴 수는 있으나 논쟁을 벌이고 싸운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밖의 압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김 교수의 문화 학술운동은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 못한채 마무리됐고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학교을 떠나게 됐다. 이후 그는 서울대 사범대 시절 스승인 고 손보기 교수가 재직 중인 연세대 사학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1997년 정년퇴임과 더불어 물러났으며 2000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됐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72699.html
밑에 본문 인용 글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는 전통적 역사학에 기초하여 우리 역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신채호 계열의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주의 역사학 또는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학자가 건재하고 있었다...중략...
그렇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이들 모두가 북상을 하였고, 따라서 그 학문적 전통이 대대적으로 계승 발전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로서 주요 대학의 교수직을 독점하였으며, 그 저술은 역사학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가는 자산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이병도의 『조선사대관』과 그가 이끄는 진단학회의『 한국사』(전 7권)이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36)
왜곡된 역사학의 청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던 학자들은 대부분 북상하고, 서울이나 기타의 대학에 남아서 학생을 교수하고 지도하게 된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역사학을 단지 과학적·합리적 근대 학문으로서 연구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사 인식의 자세가 안이하였으며 그러한 한에서는 일제하의 역사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청산 문제가 사실상 실종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중략...
친일 민족반역자 처벌(반민특위법)이 무산되었던 사정과도 관련하여, 역사학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문제를 거론하기 어렵게 하였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469)
위 출처------http://cafe.daum.net/ok211/680V/576078?docid=3957091931&q=%BF%AA%BB%E7%C0%C7%20%BF%C0%BC%D6%B1%E6%C0%BB%20%B0%A1%B8%E9%BC%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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