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운, 해바라기
이승의 맨 끝 계단을 건너는가
황홀한 멀미
포효하는 팔월 태양의 아가리 속으로
산 제물 되어
활활 목숨 사르러 가는
그
사내
권혁웅, 봄밤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한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감태준, 넝쿨장미에 대한 의문
아파트 담장을 넘나들던 넝쿨장미
자줏빛 싱싱한 꽃들이 졌을 때
아직 푸른 가시와 잎을 단 넝쿨은 뭐였을까
관리사무소 인부가 와서
꽃 떨어진 것들은 멋대가리 없다고
넝쿨을 싹둑싹둑 잘라 부대에 담아갔네
어디서 아프다, 아프다 하는 소리에
담장을 돌아보았으나
더 멋대가리 없이 잘린 넝쿨
소꿉놀이하는 아이들밖에 보이지 않았네
꽃은 왜 먼저 지는지
왜 꽃 떨어진 것들은 멋대가리 없는 것인지
일러줄 사람은 나밖에 보이지 않았네
김선호, 꿈꾸는 광고지
열개의 다리마다 핸드폰 번호를 매달고
출항을 꿈꾸고 있다
사각 몸에 신용대출에 대한 글을 친절히 적었다
머리는 세우고 다리만 흔들며 바다 속을
오르내리던 오징어들
몸이 바싹 말라있다
열개의 다리를
세상 안으로 들여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심해 속 정박해 있는 폐선 사이에서
은빛 지느러미를 팔딱이며 거친 숨 내쉬던 물고기가
오징어를 뚫어지게 읽다가
다리 한 짝을 찢어간다
다리 일부를 떼어 줄때마다
수액이 빠져나가 하얗게 말라간다
가벼워 질대로 가벼워진 몸
돛에 기대어 펄럭이고 있다
김경호, 공원에서
가을날 오후
팝콘 같은 햇살은
이마 위에 흩어지고
그리운 사람들은
애인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서 눈을 감는다
체육공원 활엽수 가지마다
붉게 고여 오르는 가을빛
하늘이 깊어갈수록
그리운 이들은 낮꿈에 젖어드는데
공터마다 녹슨 트럭들은
시멘트벽돌을 쉬지 않고 토해내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 밖으로
트럭들의 바퀴 자국은 자꾸
무거워진다
먼지구름 속에서
연을 날리던
어린 아이도 돌아간
체육공원의 오후
긴 가로수 그림자가
결리는 어깨를 짚어오는
오늘도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늙어가는 애인들은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