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락, 구름 위의 발자국
나비는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새는 죽어서 구름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무도 꽃잎의 발자국을 보지 못 한다
꽃잎이 지고 나비의 날개는 비에 젖는다
나비를 비애의 그림자라고 명명하는 건
당신 몫이겠으나 여기부터는 구름의 영역이다
당신은 꽃잎을 밟으며 꽃잠에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구름의 문장을 해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색을 지우는 건 잠깐이다
한때 나는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나
새들만이 그 너머로 날아갔음을 안다
꽃잎 위에 비 내리고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죽은 새를 들고
구름 위의 발자국을 맞히는 신궁을 기다린다
박남희, 새는 위험하다
새장에 갇힌 새는 위험하다
새장의 질서에 이미 길들어 있으므로 위험하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잘 사는 것이 위험하다
점점 무거워지는 날개가 위험하다
새장에 갇히지 않은 새는 더욱 위험하다
새장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새장에 갇힌 새를 새로 여기지 않으므로 위험하다
거대한 우주가 새장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점점 가벼워지는 날개가 위험하다
요즘처럼
새장을 팔고 사는 새는 더욱 위험하다
우주를 팔고 사는 신이 있다면
그 안의 햇살과 어둠과 온갖 소리들을
얼마로 환산하여 팔아넘길까를 생각하며
날개보다 머리가 무거워진 새는 더욱 위험하다
아니, 모든 새는 위험하지 않다
새는 이미 거울 속에 들어가
가짜 날개로 파닥거리고 있으므로
이 지상의 모든 새들은 더 이상 새가 아니므로
김완성, 비갠 후
산이 성큼
다가서네요
샘물엔 하늘이
철철 넘치고
가슴 뛰는 무지개 보면
멀리서 누가 올 것만 같아
나무처럼 강 언덕에
그 누가 서 있네요
전태련, 은총(恩寵)
나뭇가지 오래 흔들린다
내 작은 비틀림이 지구의 파장을 흔들고
그 파문으로 가지 오래오래 흔들리고 있다
이제 묵직하게 한 곳에
서 있어야 한다고
내가 흔든 혼돈이 제 진동을 찾기까지
강설
미세한 나무의 떨림 위로
고요히 눈이 내린다
하늘의 담백한 위로 받아 안으며
나무는 중심을 잡는다
눈이 나를 지운다
구상희, 들국화
아무 앞에서나
제 속살 다 내놓고
목 밀어 활짝 웃네
반갑게 오는 사람
쓸쓸하게 가는 사람 보며
무심하게 피던 그는
구름 한 떨기로 지워지는
가을, 그냥 못 보내고
함께 가슴 대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