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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무언가 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게시물ID : lovestory_885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3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0/04 21:26:2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9zkJwZ5gG6g






1.jpg

최해돈부동의 생()

 

 

 

책상 위에 스테인레스 컵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컵속의 물은

세상의 고요가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간간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저 컵은 조금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어쩌면 그의 생은

부동 그 자체라는 짧은 생각이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으리라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오직 한 자리에서

온몸으로 물을 감싸며 서 있는

 

저 여유

저 자태

저 자연스러움이

책상 위또 하나의 풍경을 연출하나니

 

오묘하여라풍경이여

 

세상의 삶이란

때론 책상 위의 움직이지 않는 저 컵처럼

고상한 생도 있음이니

나는 오늘

저 컵의 한 움큼 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경배하게 되느니







2.jpg

윤후명용담꽃

 

 

 

용담꽃 피기 시작하니

가을이 깊어가는데

남색 저고리 입고

남색 추억을 저미고

가을이 아파오는데

용의 쓸개처럼 쓰다는 그 뿌리를 혀로 녹이며

마치 마지막 밤을 밝히듯이

삶의 쓴물로

새로 태어난 배냇등불을 켜네






3.jpg

이승하하늘에 빗금 긋다

 

 

 

아버지마저 화장터에서 하얀 가루가 된 날

바라본 하늘은 참 푸르다

 

하늘의 흰 빗금 이쪽과 저쪽

 

내 부모와 함께 했던 지난 50

밭일 도와드리다 일손 잠시 놓고

제트기가 날아간 흔적

하늘의 한 줄기 빗금을

함께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지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다 안 계시니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두 분의 승하가 아니다 슬하가 아니다

 

내 자식이 고아가 될 어느 날

그날의 하늘은 또 얼마나 푸르고 깊을까

 

하늘엔 또 하나 생사의 빗금이 길게 그일 테고






4.jpg

윤지영장래 희망

 

 

 

나는 나 말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나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문 잠긴 초록 대문 앞에 앉아

길고 아득한 골목 끝을 바라보다 혼자 깨달았다

나는 나인데 나 말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세상에는 없는 게 없고 세상에 없는 건 나뿐인데

나는 나 말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내가 나 말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날 오후 그 봄의 마지막 꽃들이 한꺼번에 지고 있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노을이 골목에 밀려들 때까지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결심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나 말고 무언가 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나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갔다







5.jpg

오명선나무들의 기억파일

 

 

 

나무가 제 몸에

제 깊이만큼 시간을 새길 수 있는 것은

속살을 단단히 감싸 쥔 수피(樹皮때문이다

 

느슨한 가지를 탱탱하게 잡아당기는 햇살

순간뼈마디를 눌러주는 것들은 발밑에 있다

잎들의 향기를 받아낸 허공은

수만 번의 기록 위에 다시 계절을 쓴다

 

모두가 제 몸의 기억

바람의 중심에 서서

제 깊이만큼 그늘을 짠다

 

사후에야 볼 수 있는 저 비밀파일

 

한번도 누구의 중심이 된 적 없어

나이테를 그리다 만

미완의 압축파일

 

바람이 채워야 할 빈 서랍 같은 나날을

나는 서둘러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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