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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돈, 부동의 생(生)
책상 위에 스테인레스 컵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컵속의 물은
세상의 고요가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간간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저 컵은 조금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의 생은
부동 그 자체라는 짧은 생각이
나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으리라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오직 한 자리에서
온몸으로 물을 감싸며 서 있는
저 여유
저 자태
저 자연스러움이
책상 위, 또 하나의 풍경을 연출하나니
오묘하여라, 풍경이여
세상의 삶이란
때론 책상 위의 움직이지 않는 저 컵처럼
고상한 생도 있음이니
나는 오늘
저 컵의 한 움큼 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경배하게 되느니
윤후명, 용담꽃
용담꽃 피기 시작하니
가을이 깊어가는데
남색 저고리 입고
남색 추억을 저미고
가을이 아파오는데
용의 쓸개처럼 쓰다는 그 뿌리를 혀로 녹이며
마치 마지막 밤을 밝히듯이
삶의 쓴물로
새로 태어난 배냇등불을 켜네
이승하, 하늘에 빗금 긋다
아버지마저 화장터에서 하얀 가루가 된 날
바라본 하늘은 참 푸르다
하늘의 흰 빗금 이쪽과 저쪽
내 부모와 함께 했던 지난 50년
밭일 도와드리다 일손 잠시 놓고
제트기가 날아간 흔적
하늘의 한 줄기 빗금을
함께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지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다 안 계시니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두 분의 승하가 아니다 슬하가 아니다
내 자식이 고아가 될 어느 날
그날의 하늘은 또 얼마나 푸르고 깊을까
하늘엔 또 하나 생사의 빗금이 길게 그일 테고
윤지영, 장래 희망
나는 나 말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나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문 잠긴 초록 대문 앞에 앉아
길고 아득한 골목 끝을 바라보다 혼자 깨달았다
나는 나인데 나 말고 무엇이
왜
되어야 하는 걸까
세상에는 없는 게 없고 세상에 없는 건 나뿐인데
나는 나 말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내가 나 말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날 오후 그 봄의 마지막 꽃들이 한꺼번에 지고 있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노을이 골목에 밀려들 때까지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내가 무엇이 되겠다고 결심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나는 나 말고 무언가 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나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갔다
오명선, 나무들의 기억파일
나무가 제 몸에
제 깊이만큼 시간을 새길 수 있는 것은
속살을 단단히 감싸 쥔 수피(樹皮) 때문이다
느슨한 가지를 탱탱하게 잡아당기는 햇살
순간, 뼈마디를 눌러주는 것들은 발밑에 있다
잎들의 향기를 받아낸 허공은
수만 번의 기록 위에 다시 계절을 쓴다
모두가 제 몸의 기억
바람의 중심에 서서
제 깊이만큼 그늘을 짠다
사후에야 볼 수 있는 저 비밀파일
한번도 누구의 중심이 된 적 없어
나이테를 그리다 만
미완의 압축파일
바람이 채워야 할 빈 서랍 같은 나날을
나는 서둘러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