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최후의 승자
1598년 1월 4일 새벽 학성산 조·명연합군 진지
“허허.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거늘…. 전장이 마치 대낮처럼 밝구나….”
경리 양호는 학성산 정상에서 태화강 상류 쪽을 바라보며 일렁이는 불꽃의 더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들리는 함성과 비명이 서로 어우러져서 전쟁터의 기기묘묘함을 더욱 돋우고 있었다.
“경리 각하. 8영을 방어하기 갔던 병졸이 속속 돌아오고 있사옵니다.”
양호의 부관이 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그는 의뭉스런 눈빛으로 보고자에게 되물었다.
“그래. 전초기지를 야습한 왜적 놈들은 소탕하였다고 하드냐?”
“저…. 그게…. 적의 원군이 워낙 강성해서…. 일단 왜놈들의 공세는 막았으나, 각영의 피해가 심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퇴각 중이라고 합니다.”
“뭐야!”
부관의 실망스러운 대답에 양 경리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제 그가 믿을 곳을 오직 한 군데밖에 없었다.
“장군!”
전령하나가 그에게 헐레벌떡 뛰어와 부복하며 예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냐?”
“왜군의 야습 이후 서둘러 왜성으로 갔던 사절이 그만….”
부관과 같이 말을 얼버무리는 그의 자세에 양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또 뭐냐?”
“도산성에 보낸 사신의 목이 효수되어 장대에 걸렸습니다.”
“가등청정 네 이놈!”
붉으락푸르락해진 그의 얼굴이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휘하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내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여기 모인 장수들의 의견은 듣지 않겠소. 지금 당장! 전 병력을 모아 저놈의 왜성을 치시오. 저 성을 떨어트리지 못하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의 단호한 명령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대표로 함께 와있던 도원수 권율이 소리쳤다.
“안됩니다! 경리. 작금의 상황은 후퇴하는 병졸들을 수습하고 재배치한 후 적의 구원군을 최우선으로 막아야 합니다. 수성만이 가능한 청정에게 전군을 투입하시는 것은 호랑이의 아가리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닥치시오! 내 기필코 도산성을 함락시킨다음 청정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고야 말 것이오. 도원수는 더는 토를 달지 마시오. 이제부터 내 말을 거역하는 자는 모두 항명의 죄로 엄히 다스릴 것이오. 기억들 하시오.”
“경리….”
도원수가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이미 양 경리는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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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진 후. 자신의 군막에서 비단장식 의자에 앉은 양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권율의 말따라 마지막 공성 또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열을 정비한 왜의 원군이 속속 도산성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보고가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양 경리. 내 좀 들어가겠소.”
양호의 막사에 정적을 깨고 제독 마귀가 홀로 군막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요? 내 지금은 홀로 있고 싶으니, 나가시오.”
마귀는 경리의 박대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품속에서 꾸깃꾸깃 접힌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경리. 이거 보시오. 엊그제 우리 마군 소속 별장 김응서가 선봉으로 왜성을 공략할 때, 아군이 습득한 노획물에서 나온 것이오.”
마 제독이 건넨 의문의 서류를 본 양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짧은 글귀가 담긴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가덕·안골·죽도·부산·양산 등에서 11명의 장수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귀공을 구원하러 오니 그대는 성문을 잠근 채 기다려라. 내 특별히 휘하의 정예 수군 3 천명을 함께 보내니 적은 수륙협공으로 지리멸렬해질 것이다.
순천 왜교성에서 소서행장」
“이게 참이오?”
문서를 쥔 양손을 부들부들 떠는 양호였다. 마 제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필 병사 중에서 까막눈이 이걸 입수한 모양이요. 오늘이 돼서야 나에게 가지고 왔는데…. 적의 준동을 보면 거짓문서 같지는 않소이다.”
“이런….”
양 경리는 입술을 깨물며 비통함에 빠져있었다. 마귀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경리. 왜적의 지원군 숫자가 너무 많소. 도산성의 가등청정의 군사까지 생각해 본다면 자칫 잘못하면 천군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소이다. 이런 조선의 촌구석에서 우리 모두 개죽음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요?”
양호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작전상 철퇴를 합시다. 군사를 물려 다시 경주부로 갔다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울산성을 재차 도모하는 것이 어떻소이까?”
당장 후퇴하자는 마귀의 말에 양 경리는 버럭 화를 냈다.
“거 무슨 소리요? 이제 왜성의 함락이 코앞이거늘…. 이런 천일재우의 기회를 버리고 퇴각하란 말이오!”
“경리 각하. 현실을 주밀하게 살펴보시오. 아군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져 있고, 몸뚱이 성한 병사를 찾는 게 어려운 실정이외다. 도대체 양 경리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10만 왜군에 대적하실 요량이시오?”
“...”
그가 즉답을 내놓지 못하자, 제독 마귀는 양호의 마음속에 마지막 대못을 박고선 자리를 떠났다.
“경리께서 허락하시던 하지 않으시던 우리 마군은 이 시간부로 퇴각을 할 것이오. 차후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양 경리께서 단독으로 감당하셔야 할 것이외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소.”
다시 넓은 군막 안에 혼자가 된 양호는 잠시 고민을 하고선 부관을 호출했다. 그가 접반사 이덕형을 부른 것은 제독 마귀가 나간 지 한 다경이 못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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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습니까? 각하.”
“어서 오시오. 접반사”
양호는 침통한 심정을 감춘 채 전처럼 활기찬 얼굴로 위장하고선 접반사 이덕형을 대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간단하게 말하겠소. 성이 험준하고 왜적의 원군이 노도처럼 밀려오니 어떤 계책을 세워야 하겠소? 내 그대의 복안을 듣고 싶소.”
이덕형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선 큰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가등청정이 울산성에 포위된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이번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천군과 조선군이 훗날을 도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일 것이라 봅니다. 양 경리께옵서 1만의 군사를 풀어 태화강 상류의 주요 길목을 막고 요격할 길을 찾으십시오. 수로에서 협공하는 왜군만 경상 좌수군이 저지할 수 있다면 고립된 놈들의 숨통은 자연스레 끊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돌아온 것은 양 경리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수일을 공성하였으나 병력의 손실만 가중될 뿐, 얻은 것이 별로 없소이다. 이에 천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나 다시 뒷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소.”
“경리!”
어떤 상황에서도 존대를 잊지 않던 배운 남자인 접반사 이덕형이 양호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말인데…. 조선군이 후미를 맡아 천군이 온전히 퇴각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어야겠소. 그대가 도원수를 잘 좀 설득하여 별다른 잡음 없이 내 뜻을 관철하도록 도와주시오.”
조선군을 미끼 삼아 명군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겠다는 그의 뻔뻔한 말에 이덕형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셔도 좋소. 본인은 짐을 싸야 해서…. 험험. 한성에서 봅시다. 접반사”
양 경리는 그에게 나가달라는 손짓을 했다. 명군 접반사 이덕형은 속으로 분루를 삼키며 막사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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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끝도 없군….”
동해의 아침 햇살이 눈을 뜨기 전의 어스름한 태화강의 새벽이었다. 대장선의 망루에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운룡은 지친 상태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끈질긴 놈들입니다. 이전의 왜놈들과는 다릅니다. 영감”
함께 있던 부관이 그의 혼잣말에도 대꾸를 해줬다. 그 또한 초췌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삼경부터 시작된 왜 수군의 공세가 새벽까지 계속된 탓이었다. 그들은 과거와 같이 무의미한 전체 군선의 돌격 대신 야음을 무기 삼아 한 척씩 경상 좌수군의 포위망으로 접근해왔다. 조선 수군은 다가오는 왜선을 발견하는 즉시 불태워 없앴으나, 좌수군의 계속되는 화약소모와 군졸들의 피로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되었다.
“쳇. 크고 작은 배가 돛대가 우거진 숲처럼 하류를 뒤엎었구먼.”
아직도 무수히 남은 전방의 적선을 바라보며 이운룡이 다시 독백을 이었다. 그때였다.
“펑”
신호용 포탄이 학성산 정상에서 발사됐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좌수사와 부장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이라니….’
이번에는 아군의 사기를 고려해 할 말을 속으로 삼키는 좌수사였다. 부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영감. 어떡하실 겁니까? 왜적은 몰려오고 있는데 아군이 후퇴하다니….”
“쳇. 날이 밝으면 왜 수군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다. 제대로 된 화약 보급 없이 저놈들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항력일 터…. 설사 기적같이 왜적을 모조리 수장시킨다더라도 육지의 적이 남아 있으니….”
이운룡은 거기까지 말하고선 대장선에서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아래 병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긴장하고 겁먹은 모습이 역력했다. 이 중의 일부는 칠천량의 패전을 떠올리는 자들도 있으리라.
‘큰일이군…. 이 전투는 무위로 돌아가더라도 최대한 병력을 보존한 채 통상 대감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전방의 적선을 노려보던 좌수사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에 잠기고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박명이다. 박명!”
“예?”
갑자기 상관이 큰소리로 외치자, 깜짝 놀란 부관이 되물었다.
“박명이라 하시면?”
“그래. 박명! 왜적 놈들의 위치에선 해가 뜨기 전과 후에 사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그 시간은 다 합하면 반 시진 이상일 테니 이 틈을 타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다.”
이운룡은 거기까지 말하고선 스스로 기패관과 고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기패관은 들어라. 지금부터 본대는 첨자진을 구성한다. 병선과 방선은 안쪽에 배치하고 판옥선이 바깥을 맡도록 한다. 기를 올려 내 뜻을 모든 군선에 빠짐없이 전하라. 그리고 고수는 어서 빨리 독전고를 울려라!”
“둥둥둥”
고수의 북소리에 맞추어 좌수군의 진용이 새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좌수사 이운룡이 부장에게 명했다.
“박명이 시작되면 적선의 한가운데를 한점 돌파한다. 진영이 첨자 모양으로 적선 중앙에 파고들면 좌우의 판옥선에서 일제히 벽력포를 방포하여 적의 시야를 가리도록 하라.”
“예. 영감”
부관이 허리를 굽혀 군례를 표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운룡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모두 살아서 통제영으로 돌아가자꾸나. 가서 통상 대감께 다 같이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퇴각한 꾸지람을 듣도록 하자. 나만 당할 수야 있나? 흐흐흐”
“에에?”
부관 이하 수하 군졸들이 그의 농에 놀라는 순간에도 용감무쌍한 경상좌도 수군의 함선들은 적선의 숲으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