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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 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 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 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문태준,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맨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오명선, 얼음의 시간
과녁을 그리던 수심이 묶여있다
수면을 꽉 깨문 구름의 어금니들
밑줄 그어놓은 물의 잔뼈들이 이렇게 견고하다니
지금은 얼음의 시간
잔물결이 맨발로 견뎌야 할 저 강은
등 돌린 밤이다
톱날로 베어지는 물도 있어
계절은 제 그림자 속에 가둬둔 울음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
저것은 침묵의 두께
내 무릎관절이 수천 번을 더 오르내려야 할
미완의 경전이다
앙다문 물의 입술
굳어버린 물의 표정은 싸늘하다
강영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당신은 나를 건너고 나는 당신을 건너니
우리는 한 물빛에 닿는다
눈발 날리는 저녁과 검은 강물처럼
젖은 이마에 닿는 일
떠나가는 물결 속으로 여러 번 다녀온다는 말이어서
발자국만 흩어진 나루터처럼
나는 도무지 새벽이 멀기만 하다
당신의 표정이 흰색뿐이라면
슬픔의 감정이 단아해질까
비목어처럼 당신은 저쪽을 바라본다
저쪽이 환하다 결계가 없으니 흰 여백이다
어둠을 사랑한 적 없건만
강둑에 앉아 울고 있는 내가 낯설어질 때
오래된 묵향에서 풀려 나온 듯
강물이 붉은 아가미를 열고
울컥, 물비린내를 쏟아낸다
미늘 하나로
당신은 내 속을 흐르고 나는 당신 속을 흐른다
최규승, 커튼
일몰의 시간
실내등을 켜기 전에
귓속에 물을 붓고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바닷속은 차고 몸은 따뜻해
말도 없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쏟아붓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만히 서 있다
돌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은 듯하다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을
말할 때 나는 아프다
김 한 장에 입술이 베였던 그때
하얀 침대 위에서 나는
아름다움으로 어지러웠다
누군가의 안녕을 묻기에
내 시는 아직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