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외로움이 미끼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수담(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일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에 이마 닿도록
나도 한 마리 마음물고기 따라나서지만
드넓은 바다 들끓는 파도로도
더는 제 속내 펼쳐 보이지 말라고
자욱하게 저물고 있는, 저무는 바다
그 파랑 속속들이 헤매고 온 물고기 한 마리
한입에 덥석 나를 물어줄 때까지
나 아직도 바닷가에 낚시 드리우고 서 있다
어느새 바다만큼 자라 내 앞에서 맴도는
물고기 한 마리 마침내 나를 물고
저 어둠 한가운데 풀어놓아줄 때까지
이수익, 앞
나는
앞이 좋다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전진의
앞
가슴을 송두리째 부대끼면서 환히
비바람으로 맞는
맨 정신의
앞
그 앞이 좋다
뒤를 돌아보지도 말자
또는 옆을 바라보지도 말자
오로지
최전선의 앞을 향하여
끝없이
굴복하자
정면으로 날아드는 무더기 돌팔매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온몸을 얻어맞아도
산산이 부서져도
앞은
그래, 끝없이 앞이다
당당하게
내가 서야할 자리를 비켜다오
앞
내가 돌아서지 못할 최후의 앞
천양희, 거꾸로 읽는 법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는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보면
하루를 물구나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다
어제는 어제를 견디느라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성(直星)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냐, 한다
거꾸로 읽을 때마다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도 문득
어느 시인처럼
자유롭게 궤도를 이탈하고 싶었다
양애경, 나팔꽃 안
두 팔, 벌려
보랏빛으로 펼치고
안은 하얀 사기 사발처럼
비어 있는
나팔꽃 피었어요
원래는 비어 있던 것 같지 않은
그 환하고 고요한
방 안
들여다보면
함께 있어 행복하던
사람
생각나요
손진은, 폭설
지상의 하는 짓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하늘은 저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
폭발하듯 글줄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시커먼 지붕과 굴뚝, 거리와 나무와
사람, 개들의 뺨을 만지는
흰 먹으로 된
점과 선들의 무한 율동이
헤엄치듯 사물의 몸짓을 빌어
음과 뜻을 그리는 문자화(文字畵)
쉬지도 지치지도 않고 긋는 저
획선들에 감정이 실리면서
필획이 굵어지고 대담해지다
마침내 우우 떼로 몰려 찢고 부러뜨린다
그 마음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욕망의 바퀴들
느닷없이 고립되고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진다
그럼에도 끝내 지상의 선민들은 못 알아차린다
저렇게 무수한 글씨들이 만드는
시린 여백 속에
하늘 마음이 봉인돼 있다는 걸
때로 그걸 얼음문자로 만들었다가
자신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하늘은
햇살 같은 걸 내려보내
굳은 마음을 슬슬 푼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