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거지 시인 온다
철없는 모더니스트 시절
명동에서
내 친구들이
새카만 얼굴의
천상병이 나타나면
야, 저기 거지 시인 하나 온다라고
우스갯소리 했지요
상대 나왔다는 친구가
뭐 저러냐
너 또 200원 줘라
그렇잖아도 널 알아보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빈정댔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때 천상병이를 거지시인이라 놀려주던
친구들은 다 시인이 못 되고
천상병이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군요
영원히
심재휘, 남쪽 마을을 지나며
서러움 하나 간신히 빠져나갈
참나무 숲을 지나자 가을 저녁은
목화밭 너머의 봉분들과 참
다정해 보였습니다
마을은 낡은 그림자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습니다
초행길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전생 하나를 밟고
신발이 더러워지기도 했습니다만
무덤 같은 신발로 오래 걷다 보면
낯선 곳에서도 겨울은 맞을 만합니다
단지 잎 다 진 키 작은 나무에
탐욕스럽게 매달려 있는 모과처럼
오늘과 나는 서로 이복형제 같아서
조금 서러웠습니다
허수경, 공터의 사랑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이상국, 옥상의 가을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김위숙, 늙은 오후
칠 벗겨진 외벽은
광대뼈 드러나도록 문드러지는 우주다
외벽 앞 빨랫줄에
호박오가리 말라가고
책꽂이 한 구석 빛바랜 오후가
길게 늘어진 가을 위로
바쁘게 매달린다
점박이날개나비
묵언처럼 말아쥐고
저 선을 넘어왔을 늘어진 빛이여
말라죽은 딱정벌레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에 홀린 걸까
늘어졌던 몸통
칭칭 걸어 말린
저 문들어지도록 깃들었던
간절함도 우주의 그늘처럼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