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Sj_77ahq0vo
유자효, 새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갯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 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이재무, 진공청소기
먼지도 밥이 된다
삼시 세끼가 아니라
일주일 한두 번
폭식하는 그녀의 장기
투명하여 먹은 양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는 생활의 바로미터다
날마다 태어나 자란 먼지들
살집 불리면 발동하는 시장기
그녀의 식탐은 식을 줄을 모른다
고봉의 밥 싹싹 달게 비워내며
청결을 과신하던 그녀도
그러나 식구와 더불어 산 지 십 수 년
근년 들어서는 근력 부치는지
식사량 주는 대신 식사 시간이 늘고
음식물 흘리기도 하고
먹은 것 도로 게워내기도 하더니
평생 안하던 밥투정을 다 한다
먼지의 유구한 힘을
누군들 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 세상 한결 같은 것은
먼지밖에 없는 것 같다
정현종, 어떤 적막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홍문숙, 파밭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이상국, 싸움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 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