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znBvpo9-2AE
황학주, 저녁의 연인들
침대처럼 사실은 마음이란 너무 작아서
뒤척이기만 하지 여태도 제 마음 한 번 멀리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만이 당신에게 다녀오곤 하던 밤이 가장 컸습니다
이제 찾아오는 모든 저녁의 애인들이
인적 드문 길을 한동안 잡아들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수습할 수 있도록
올리브나무 세 그루만 마당에 심었으면
진흙탕을 걷어내고
진흙탕의 뒤를 따라오는 웅덩이를 걷어낼 때까지
사랑은 발을 벗어 단풍물 들이며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어디 사는지 나를 찾지도 않았을
매 순간 당신이 있었던 옹이 박인 허리 근처가 아득합니다
내가 가고
나는 없지만 당신이 나와 다른 이유로 울더라도
나를 배경으로 저물다보면
역 광장 국수 만 불빛에 서서 먹은 추운 세월들이
쏘옥 빠진 올리브나무로
쓸어둔 마당가에 꽂혀 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올리브나무로 내 생에 들어주었으니
제 운동도 시작하고 오래 살기만 하면
마종기, 기적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문인수, 동강의 높은 새
동강 높이 새 한 마리 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
김달진, 씬냉이꽃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新綠)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박노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 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