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 철개에 올렸던 글인데... 예술은 예술계에 올려야 제맛이겠지요.
루소의 1890년작, '나, 초상-풍경'
예술가를 통해 예술 전반을 논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예술의 일면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루소만큼 부조리한 화가도 없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이해도 없이 무척 정직한 아마추어 실력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가 되고 이후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까지 추앙받았으니 말이다.
내가 볼 때, 앙리 루소 이 사람 참 우끼고 자빠진 화가다.
연민의 정도 느껴지지만 어떨 땐 참 어이없는 사람이다. 인간적으로는 딱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루소는 1844년 프랑스 북서부의 라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 후 함석노동자 등을 전전하다 일찍 죽고 말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가장으로서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기댈데 하나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문인지 그는 평생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출세에 대한 어마어마한 욕망을 품고 살아갔다.
그는 두 손 꼭 쥐고 생각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성공하리라..."
하지만 성년이 될 무렵
그는 자신을 사환으로 고용해준 변호사 피용의 금고에서 30프랑을 훔치다 발각되어 철창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당시 프랑스정부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병사가 부족했기에 죄수들에게 죄를 사면해 주는 대신 군에 지원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미국처럼...)
그는 당연히 사면을 위해 군에 지원했고, 제대한 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파리로 이주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했을 거고 얼굴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아는 조그마한 고향마을에서 죄수 딱지를 붙이고 살기도 힘들었을 거다.
물론 나이가 들어 낮짝이 두꺼워진 후에는 이 경험을 가지고 자신이 참전용사였다고 뻥치고 다니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남부끄러웠나 보다.
그가 파리로 이주할 즈음... 1868년의 파리는 산업혁명과 식민지수탈정책의 결과로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었다.
활력으로 넘치는 도시... 공장에선 기계가 대량으로 상품을 찍어내고 항구에선 전 세계 식민지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풍성한 물자와 화려한 문화 거기에 더해 이루어지는 기술혁신은 장미빛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한편에서 마네, 모네 같은 이들은 회화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었다.
사물의 재현을 중시하던 시대에서 화가의 감성과 표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지오토 이후 낡은 회화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소에게 파리는 그 누구하나 반겨주는 이 없는 차갑고 쓸쓸한 도시였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고난과 역경을 친구삼아야 했던 그는 결국 파리에서의 살아남기에 성공한다.
1869년 재봉사였던 클레망스와 결혼하고 1871년에는 파리 외곽의 세관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비록 작은 일이었지만 그는 결국 안정된 삶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187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술적 감수성은 풍부했던 것 같다.
'러시아 고아의 복수'라는 소설(시였나?)도 쓰고, 자신의 아내를 위해 작곡한 클레망스 왈츠란 곡으로 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나 음악이 아닌... 그 누구하나 인정해 주는 이 없는 그림을 택했다.
그는 1885년 조그맣게 작업실을 마련하고서 본격적인 일요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요화가란 한 주 동안 열심히 일한 뒤 남들 다 쉬는 일요일에 밖으로 나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일반시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얼마 못가 그림의 'ㄱ'자도 모르면서 무작정 붗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떡칠하는 아마추어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그림 실력이 좀 난망했던 게다.
그러든 말든...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인상파 화가들에게조차 놀림을 받으면서도 꼬박꼬박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살롱이란 유럽귀족들의 사랑방을 의미하는데, 이 사랑방이 요즘의 왠만한 4~5층 건물만 했다.
이 사랑방 벽에 그림을 걸고 전시하던 것이 살롱전인데, 여기에 그림이 걸려야 그림이 팔리던 시절이라
젊은 화가들에게는 등용문이요 기성 화가들에게는 자신의 실력이 건재함을 증명하는 경기장이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에 들어가지 못한 일군의 화가들이 있었는데, 바로 인상파였다.
지금 우린 인상파를 상당히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당시 인상파는 아카데믹한 주류화가들에게 비웃음만 사는 조무라기들이었다.
뎃셍의 기본도 채 익히지 못했으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린답시고 개인의 감성이네 뭐네 하며 수준 이하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입만 산 얼치기들이었다.
사실 인상파의 얼굴마담격인 마네의 그림을 보면, 구도나 투시, 빛의 사용, 재질감의 표현 등에서 그 기술이 현격하게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물론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으니 평범한 사람이 볼 때는 잘 그렸다고 느끼겠지만,
약간의 감식안만 있으면 그 치졸함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주류화가중심의 살롱전에서 번번히 낙선했던 건 그들의 이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교부족 때문이었다.
참고로 루앙성당 연작이나 수련연작으로 유명한 모네는 그 와중에도 살롱전에서 많은 상을 탔다. 잘 그렸거든...
우리가 마네를 높이 평가하는 건 그 기교 때문이 아니라, 그림의 목적을 재설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담 기회에 자세히...)
그런데 그런 인상파들도 비웃는 한 무리의 화가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일요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아무런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 가진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림은 괴발세발이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따라하기는 하는데... 영 시덥지가 않았던 것이다.
1907년작, 평화의 사절로 공화국에 인사하러 온 열강의 대표자들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라고 했다면 난 반대의 의미로 '이 그림을 보라'라고 하고 싶다.
이 그림을 보면 손 발이 오그라든다. 잘 해봐야 그림 잘 그린다 소리 듣는 중3학생의 그림 같은 이 작품... 루소의 작품은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평생을 이 정도 수준에서 맴돌았다.
그림의 구도는 고사하고... 투시도 없고, 빛의 방향도 재멋대로고 사람크기도 들죽날죽... 인물의 옷이나 단상, 깃발, 하늘 등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기념할만한 일이 생기면 정부에서 유명작가에게 이를 그림으로 남겨줄 것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게 좋아 보였는지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자기 스스로 이런 기념화(이걸 기념화라 할 수 있다면--;;)를 그린게다.
'나도 유명작가가 되고 싶어요', '나도 인정받고 싶어요'라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지도 모르겠다.
사실 맨 위의 그림도 같은 마인드에서 그려졌다.
빵모자에 붓과 빠레트를 들고 있는 본인 뒤에는 깃발이 하나 가득 달린 범선과 에펠탑이 그려져 있고, 하늘에는 기구가 떠 있다.
자신에 대해 내세울게 없으니 당시 열리고 있던 만국박람회에 기대어 자신이 위대한 화가인양 표현한 것이다.
당시 화가들은 자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기술로 자화상을 그렸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주위에 책이나 해골, 나팔 등의 도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루소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당시 가장 잘 나가던 국가행사에 자신을 갖다 붙이고 있었다.
자신을 그리는게 자화상이란 건 알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기교와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건 몰랐던 거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주제를 모르면서 성공에 대한 열만만 가득했던 사림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받기 시작하더니, 일요화가들의 우상이 되고, 결국엔 현대회화의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1910년 서거했는데(이거 참 서거라고 하기엔 좀 쑥스러운 분인데... 암튼)
1924년 초현실주의 그룹이 결성될 때, 그들은 루소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추켜세웠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루소의 그림실력이 죽기 전에 갑자기 일취월장해서? 인상파처럼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서? 아님 어떤 영웅적인 행동을 해서?
아니다.
그는 죽기 전 해(1909년)에 한 젊은 은행원과 짜고 금융사기를 치려다 발각되어 재판에 회부될 정도로 난감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재판에 회부되서는 "저 젊은 것이 절 꼬득여서 그랬어요. 저 한 것도 별로 없어요. 제가 회화에 기여한 공을 생각해서 좀 봐주세요"라며
싹싹 빌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양심도 없는 기회주의자에 거짓말쟁이, 사기꾼, 협작꾼이라 불리면 딱이다.
자신이 그림에 기여를 해 봤자 얼마나 기여했다고...(라고 하고 싶지만 기여가 많았음을 부정할 순 없다.--;;)
입체파 화가였던 레제는 루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루소는 현대예술을 전혀 몰랐다. 현대작가들이 그의 그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루소는 당시 자신을 사실주의 화가라고 주장하고 다녔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의 후계자들은 그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라 불렀다.
자기가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당시 새롭게 떠오른 젊은 화가 피카소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현대회화에는 두 거장이 있다네. 피카소 자네와 바로 나지. 이집트양식을 대표하는 자네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나 말야. 하하~ 이 놈의 인기란~"
입체파를 이제 막 창시하고 있던 피카소는 너무 벙쩌서 그저 바라만 봤다나 뭐라나...
그는 항상 "그림으로 제롬만큼 유명해지고 돈을 벌 수 있다면"이라고 중얼거렸는데, 제롬은 당시 제일 잘 나가던 고전주의 화가였다.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어요. 성공해서 돈 벌고 싶어요. 돈 벌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래요."가 그의 모토였던 게다.
그림의 'ㄱ'자도 모르던 사람... 붓질도 모르고 물감 개는 방법도 잘 모르던 사람...
돈 벌고 싶다고 금융사기까지 계획하는 이런 '몹'스런 마인드의 위인이 어떻게 성공한 걸까?
그림에 대해서는 기술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무뇌아에 가깝던 그가 어떻게 현대회화를 개척할 수 있었을까?
그는 현대회화의 미스터리다.
(물론 당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는 거다.)
사실 그가 한 건 그저 자신이 그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 뿐이다.
그림을 보면 정말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그렸다. 착하고 말잘듣고 성실한 초등학교 5학년 반장처럼 그렸던 거다.
그런데도 그가 현대회화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상파가 회화의 개념을 재현중심에서 표현중심으로 변화시키자
화가들의 최우선과제는 이전 처럼 규범에 맞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되었다.
천편일률적인 기교에서 벗어나자 작가 개개인의 개성을 내세워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타이밍에 루소라는 한 마리 개미가 나타났다.
그는 평범한 일개미였다. 평생 일만하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죽어갈...
남과 다른 것이라곤 오직 그림에 대한 열망, 그것도 그림을 그려 돈 많이 벌겠다는 생각 밖에 없는 일개미였다.
성당에서 찔끔, 박물관에서 찔끔 눈요기한 그림들을 떠올리며, 항간에 떠 도는 인상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며,
어떻게 그리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나름대로 캔버스에 붓질을 해댄 '몹'스런 개미였을 뿐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만의 길을 가야 했다.
조금씩 인정받아 소위 예술계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도... 당췌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해대는 인간들 틈에서
왜 자신을 인정해 주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인간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치밀어 오르는 자격지심을 억누르며 당대의 신진화가들에게 큰 소리만 뻥뻥 쳐댔던 일개미였을 뿐이다.
그는 과연 로또를 맞은 행운아에 불과했을까?
1907년작, 뱀을 부리는 주술사
그가 예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위의 그림을 그린 후다.
기교로 보면 변한게 없다. 하긴 앞의 그림이 1909년의 그림이다. 기교로 따지면 못하면 못했지 잘난건 없었던 거다.
그런데 빤히 보다보면 왠지 그림에 끌린다. 그림도 정갈하고 볼수록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다...
그는 현실을 재현하는 기교가 부족했을뿐,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기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말이다.--;;)
그는 제대로된 그림은 그릴 줄 몰랐지만, 남들 다 무시하는 그림이어도 땀 뻘뻘 흘리며 정성스럽게 그리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맨 밑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나뭇잎 한장 한장이 어쩜 그리 정성스러운지 모른다.
즉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야 치기어린 '몹'이지만, 예술이라는 전체 테두리 안에서 보면
누구보다 새로운, 아직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려보지 못한 세계를 개척한 프론티어였고,
예술에 대한 경외와 열정을 지닌 성실한 예술가였던 거다.
(훗~ 왼손은 그저 거들었을 무식은 그저 거들었을 뿐...)
그의 작품, 그의 예술... 그건 직관의 세계였다.
그의 능력으로는 그게 뭔지,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세계였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지만 자신으로 손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세계, 자신의 손으로 그리지만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세계였다.
그는 다만 느껴지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는 체 붓에다 모든 걸 맡겼을 뿐이다.
그가 모른다해서 그것이 예술이 아니었을까? 그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왜 붓질조차 모르던 그의 그림을 예술이라 부르는 걸까?
그는 그림의 기교도 배운적이 없었고 그림의 이론도 이해한적이 없었지만, 그림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강하게 느꼈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를 비웃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는 자격지심에 쩌들고, 기교도 이해력도 없고, 헛소리 작렬에 성공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삼류 따라지였다.
하지만 그건 주류라고 불리는, 정규라고 불리는 기준에서 볼 때의 평가에 불과하다.
예술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재현이다. 감성이다. 표현이다. 의미이다. 등등을 외치고
그들간의 상관관계를 따지고 구분짓고 평가하고 정의를 내리는 사람들...
자기들끼리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 틀 안에 머물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밖의 세계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평가에 불과하다.
루소는 예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예술을 이해하고 그려내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럼 대체 예술이 뭐냐고? 나도 모른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있고, 예술에 대한 념은 있어도... 예술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고 예술이 없어지나?
예술이란 마치 팔정도를 가르는 정견이나, 사단칠정을 관통하는 중용같은 것이다.
쉽게 생각해 여기 원이 있다치자. 원이란 우리의 념이고 삶이다. 어떤 것은 좀 작고 어떤 것은 좀 크고 어떤 것은 길죽하고 어떤 것은 각지다.
그런 수많은 원들이 여기에 그려지고 있다. 그럼 그 원의 중심은 어디 있을까? 어느 한 곳에 모여지지 않을 것이다.
중심은 있지만 이것 혹은 저것을 중심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그려지는 원들 속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위치를 옮길 것이다.
그렇다고 중심이 없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난 그것이 예술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삶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루소 같은 화가가 나와 예술을 풍성하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럼... 그래서 나도 루소를 좋아하냐고?
풋~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의 일생을 돌아볼 때... 난 별로다.
그건 그의 삶이고 그의 예술이다. 그저 그가 그렇다는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 하나 보여주며 마무리 하겠다.
동아대백과사전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던 시절... 그래서 엄청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던 그 시절... 그림은 다 이렇게 그리는 건 줄 알았던 시절...
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눈 뜬 장님이었다. 루소와 미켈란젤로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몰랐으니 말이다.
그땐 그냥 다 잘그렸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시절 다 지난 지금도 이 그림... 참 마음에 든다.
멋지다.
1908년작, 풋볼선수들
참고로(말 많아 미안하다--;;) 이 그림... 일요일에 놀러나온 풋볼동호회의 모습이다.
그는 이 그림처럼 결혼식, 동호회나 훈련하는 군인 등... 일반시민들의 모습을 자주 그렸다.
물론 잘난 사람들이 모델을 해줄리도 없었겠지만... 이들 일반시민들은 루소의 모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들에게 루소는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저렇게 뜨다니, 나도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어쩌면 1900년대의 '폴 포츠'라고 하면 될려나?
그건 그의 직장 상사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자 오후에는 세관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덕분에 세관 근처의 풍경화도 많이 남아있다.
맘씨 좋은 세관 상사의 호젓함이 느껴진다.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