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나무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김남조, 5월의 연가
눈길 주는 곳 모두
윤이 흐르고
여른여른 햇무리 같은 빛이 이는 건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듯 홀로인
사양(斜陽)의 창가에서
얼굴을 싸안고 눈물을 견디는 마음은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발돋움하며 자라온 나무들
땅에 드리운 그 눅진 그림자까지
초록빛 속속들이 잦아든
5월
바람은 바람을 손짓해
바람끼리 모여 사는 바람들의 이웃처럼
홀로인 마음 외로움일래 부르고
이에 대답하며 나섰거든
여기 뜨거운 가슴을 풀자
외딴 곳 짙은 물빛으로
성그러이 솟아 넘치건만도
종내 보이지 않는 밤의 옹달샘같이
감청(紺靑)의 물빛
감추고
이처럼 섧게 불타고 있음은
내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유경환, 이 작은 나의 새는
수없이 작은 날개들 모여
숨 쉬일 터전 스스로 깁고
가슴에서 날아간 쬐그만
새 한 마리
날개 틈에 숨은 먼지를
뽑아 내 쪼아먹으며
작은 날개들에 얹혀
숨통을 뚫으며
나의 새는 의식의 바다에서
침몰을 모면할 것이다
날개 틈에 숨은 먼지로
한 삶을 살면서
나의 새의 어머니, 또 어머니의
그 작은 날개털의 청결을 위해
스스로의 눈을 닦고
외로운 생각을 방울로 떨어뜨려
오늘 이 한낮
비의 바다에 한 줌을 더 보탠다
나해철, 비
비 오는 날은
젖었다
함께라면 기쁨에
따로라면 그리움에
젖었다
시간이 흐르고
비 오는 날은 젖었다
당신은 뼈아픔에
나는 슬픔에
젖었다
당신 얼굴에 흐르는 비로
멀리서도
내 얼굴 젖었다
박라연, 그 곳에 가니
그 곳에 가니 누군가의 밭이 있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중의 소유 임야라는 팻말 아래
어디든 마음 붙이고 싶어서 타인의 마음속
한 귀퉁이를 파고들었겠지
허락은 받았을까 눈감아주겠다 했을까
남의 마음속에서도 저렇게 뿌리내릴 수 있는 힘이 있어
상추 쑥갓 당근 콩 유채꽃으로 피어 흔들리고 있다
저만큼 자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작은 별들이 유채꽃 사이에 앉았다가 날아가고
앉았다가 날아간다
성당 골목에는 예쁜 소녀도 보이고
여든쯤 보이는 할머니도 보인다
나는 이제 저 할머니가 그랬듯이
남은 날들을 채우기 위해 살아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길
누군가 내게 깊은 입맞춤을 해준다
내 마음속에 일고 있는 슬픔을 모두 뽑아버리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