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진달래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표적 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 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김종삼, 풍경
싱그러운 거목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 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유하, 매혹
어젯밤 내린 빗물의 길을
온몸으로 걸어서
언덕까지 올라온 미꾸라지 한 마리
햇볕이 나자, 그가 돌아갈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지개가 떴다
이기철, 아름답게 사는 길
그 작은 향내를 맡고
배추밭까지 날아온 가난한 나비처럼
보리밭 뒤에 피어난
철 이른 패랭이꽃처럼
여름밤 화톳불가에서 듣던
별 형제 이야기처럼
개나리 꽃잎에도 눈부셔
마을 앞길을 쫓아가는
병아리처럼
조태일, 달빛
달빛 속에서 흐느껴본 이들은 안다
어째서 달빛은 서러운 사람들을 위해
밤에만 그렇게 쏟아지는지를
달빛이 마냥 서러워
새들도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세상을 껴안을 때
멀리 떠난 친구들은 더 멀리 떠나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 기별들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 멀어만 가고
홀로 오솔길을 걸으며
지나온 날들을 반성해본 사람들은 안다
달빛이 서러워 오늘도
텅 빈 보리밭에서 통곡하는
종달새들은 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세상을
힘껏 껴안으며 터벅터벅
걷는 귀가길이
왜 그리 찬란한가를 아는 이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