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폭풍전야
1598년 1월 3일 아침 학성산 조․명연합군 수뇌부 진지
이날 아침 경리 양호의 거처에서 군의가 열렸다. 모임에 참석한 휘하 제장들은 초췌한 모습을 하고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른 왜성의 왜적들이 도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속속 울산으로 모여들고 있음을 첩보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날에는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적선 수백 척이 태화강 하구의 염포(왜란 전 삼포 개항지 중 하나)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육지의 왜군 또한 무수히 많은 깃발을 내세우며 전진하고 있음이 척후병들에게 감지되었다.
다급해진 양 경리는 유격장 파새를 왜성 남쪽의 반구정으로 보내고, 부총병 오유ㅊㅜㅇ등을 태화강 상류로 보내어 적을 막게 했다. 그러나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악조건 속에서 군사들은 동상에 걸리고 군마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조․명연합군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왜군 구원병의 첫 번째 공격은 막아 내었으나, 아군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답이 없소. 왜적의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낸 만큼 적장 가등청정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저 도산성을 한시바삐 무너트려야 하오.”
경리 양호의 바로 앞 좌편에 앉아 있던 제독 마귀가 침통한 분위기를 깨고선 입을 열었다.
“마 제독. 그걸 누가 모르오? 허나 공성과 압박을 병행해도 효과가 없으니….”
마귀의 말에 양호는 핀잔을 주려다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의 지연전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경리. 저들이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면 숨통을 티여 주어 끌어냅시다. 포위한 삼면 중에서 한쪽을 열어 왜군의 막힌 혈도를 뚫어 주면 저들이 나오지 않고 선 못 배길 것이요. 그때 복병을 배치하여 일거에 기습을 가한다면 승산이 충분히 있소이다.”
“험험. 그러다 도산성의 왜적이 적의 구원군과 합류한다면 어떡하실 것이오? 모 아니면 도라는 그런 위험한 도박에는 천군의 목숨을 걸 수 없소이다.”
양호는 마 제독에게 면박을 주고선 고개를 돌려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의 의제를 말했다.
“오늘 아침에 청정의 부장이란 자가 나를 찾아왔소. 그가 말하길 청정이 항복회담을 재기하는 것을 원한다 하오. 이전 협상보다 더 나은 조건들도 제시했소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제장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오.”
“아니 될 말입니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명군 접반사 이덕형이 큰소리로 외쳤다.
“왜적의 수괴 청정은 이미 한 번의 협상을 무위로 돌린 적이 있습니다. 원군까지 나타난 마당에 굳이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자고로 왜국은 지난 백 년 간 금수만도 못한 칼잡이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죽고 죽이길 반복한 나라입니다. 이 상황에서 가등청정이 그러한 제안을 하는 것은 조․명연합군이 구원군과 싸워 전력이 줄어들었을 때 성에서 나와 어부지리를 챙길 요량일 것입니다. 경리 각하”
“그럼. 저 성을 까부수는 데 있어 달리 묘안이라도 있으시오? 접반사? 내 귀공의 감언이설에 속아 지구전을 펼쳤다가 역포위의 위기에 빠졌거늘….”
이덕형의 바른 소리에 되려 면박을 주는 양 경리였다. 접반사는 다시 말을 이으려 했으나, 옆에 있던 도원수 권율이 그의 손목을 잡고선 만류했다.
“흠…. 딱히 쓸만한 상책이 없으니, 내 가등청정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것이오. 그의 정예 조총병이 우리와 합류한다면 구원군 따위는 두렵지 않소. 이만 군의를 마치겠소.”
경리 양호는 그의 말에 반발하며 황급히 회의를 파했다. 마 제독은 그런 양호에게 반발하여 독대를 신청했으나, 그는 받아드리지 않았다.
---
1598년 1월 3일 저녁 도산성 근처 아동포살수대 진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미남자가 막사 안 침상에 누어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 아니 그녀. 포수 울이었다. 울이는 미관을 찡그리고선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울이야. 괜찮냐? 나 좀 들어갈게.”
군막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동살수대 초관 산이가 문병을 온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아.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선 자리에 반듯이 앉았다. 울이는 두툼한 솜이불로 온몸을 감싼 채 애써 밝은 얼굴을 하고선 그를 불렀다.
“응. 이제 들어와.”
산이가 그녀의 막사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먼저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산이의 안쓰러운 눈빛이 울이에게 닿았다. 그는 근처에 있던 나무궤짝 하나를 의자 삼아 울이랑 마주 앉았다.
“뭘 그렇게 처다보누. 사람 아픈 거 처음 보니?”
“아…. 아니야…. 근육질은 아니라도 튼튼하기로 소문난 네가 고뿔이 들었다기에 어떤가 해서…. 얼굴이 핼쑥해진 걸 보니 맞긴 맞네. 혹…. 다른 병과 함께 온 거 아니냐?”
울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이야? 왜적 놈들의 원군이 나타나서…. 연합군 수뇌부가 발칵 뒤집혔다는데…. 명색이 초관인 작자가…. 이렇게 한가하게 병문안이나 와서…. 되겠니?”
그녀는 힘겹게 말을 끊으며 자신을 찾아온 그를 타박했다.
“에헴. 부하의 건강상태를 주밀하게 살피는 것도 초관의 임무라서 말이지.”
울이의 반응을 미리 간파한 산이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좀 더 다가와서는 그의 옷 속에 들어 있던 꾸러미들을 꺼내어 침상 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야?”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기에 명나라 상인한테 환약 몇 개 사왔다. 전장이라 탕약은 다리기 어렵잖아.”
울이는 호두만 한 환약 한 개를 집어들었다. 한약 특유의 씁쓸한 향과 함께 달콤한 꿀 내음이 잘 버무려진 감기환이었다.
“냄새 좋지? 일부러 꿀 넣은 걸로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니만, 자기가 나중에 먹으려고 꼬불쳐 논 걸 마지못해 주더라고. 이거 니가 준 월병보다 쬐금 더 비싼 거야. 헤헤.”
산이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평소보다 더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울이는 그의 과장된 행동을 눈치채고는 평소처럼 손을 뻗어 꿀밤을 매기려 하였다. 하지만 맥이 빠진 그녀의 손목은 산이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에구. 이리 힘이 없어서 어짜누. 조총이나 바로 들겠냐? 이거 먹고 어서 기력을 회복해서 전처럼 내 거시기도 시원하게 단련해주라. 이젠 네가 건드리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니까. 하하”
“걱정하지 마라. 내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 네 소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줄 테니.”
울이는 산이에게 악담을 퍼붓다가 갑자기 어지러운지 침상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침상에 바로 눕히고선 이불을 폭 덮어주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누어서 땀을 쭉 빼고 있어. 내 화로의 숯을 단단히 넣어 놓고 가마.”
뜻밖에 예의 바른 행동을 하는 산이의 의젓함에 울이는 놀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군막 가운데 있는 청동화로에 숯을 집어넣는 그를 보며 그녀는 이불로 입을 가리고선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자. 다됐다.”
산이가 갑자기 울이 쪽으로 돌아보자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울이의 눈빛이 정처 없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까 준 환약 덩어리와 함께 있던 꾸러미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에 그녀의 눈길이 닿았다.
“저기…. 환약 옆에 있는 건 뭐야?”
“아. 이거?”
산이는 침상 밑에 있던 걸 꾸러미 중 한 개를 다시 그녀 곁으로 가지고 왔다. 그가 가지고 온 종이뭉치 안에는 푸른빛이 영롱하게 도는 작은 유리 종을 꺼냈다.
“이쁘지? 왜국에서 유행하는 풍경이야.”
“그래…. 참 예쁘…. 아니 이런 건 왜 가지고 왔어?”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봐 일부러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그녀였다. 산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자애들은 이런 작고 반짝이는 물건에 환장한다던데?”
“누가 그래! 그리고 내가 계집이니 여자니 그런 얘기하지 말랬지! 아야….”
흥분한 울이는 자신도 모르게 발딱 일어났다가 아픈 배를 부여잡고선 다시 누었다. 산이는 손짓으로 그녀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알았다. 알았어…. 너 그거 아니? 왜국에서는 후링 끝에 탄자쿠라는 작고 긴 종이에다가 원하는 걸 적는 풍습이 있다더라. 험험. 나도 붓을 좀 놀려 봤으니 나중에 다 나으면 읽어봐…. 헤헤. 그럼 나간다. 참. 이따가 밤에 스승님이 문병 오실 거래. 원래 나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들릴 때가 있으시다나.”
“야!”
울이가 그를 급하게 불렀지만 산이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장막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그녀의 귓가에서 멀어지자, 천막 속 병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가 둔 유리풍경을 집어 들었다. 풍경 속에는 그의 말처럼 예쁜 유리구슬 밑에 색지로 곱게 멋을 낸 작고 긴 종이가 달려 있었다.
「울이의 병이 빨리 낫기를.」
「울이와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기를」
그의 괴발개발 한 글씨를 보면서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산이야 나도 네가 싫지는 않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