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밤비와 놀다
단 하나의 빗방울로도
내가 기대고 있는 이 밤은 부서져나간다
숲의 나무들 소스라치며 부산히 서로의 잎사귀를 부비고
꺼져가던 바람도 힘을 얻어 풀밭 위를 달린다
내 이마를 때리는 단 하나의 빗방울이
나를 눈뜨게 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돌연 빛나게 한다
파리한 손을 내밀어 받아보는 이 한 방울의 비
내 손바닥의 생명선을 가로질러
머나먼 강까지 무한한 물을 흘려보낸다
이 한 바울의 비에 밤은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나를 가둔 어둠도 서서히 녹아내린다
어둠의 가지 위에 깃을 접고 앉아 있던 새들도
음조를 바꾸어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활시위를 떠나는 저 빗방울의 가벼운 몸놀림
쉬쉿거리며 은빛 화살촉이 내 살갗을 스칠 때마다
내 발목엔 작은 날개가 돋는다
오 나를 반기며 나를 어루만지는
정다운 물의 자매들이여
내 낡은 외투를 너희 재잘거림으로 빗질해다오
헝클어진 젖은 머리칼에 무지개가 번득이도록 해다오
단 한 방울의 비에
이 밤 나는 산산이 부서진다
이성선, 고요를 열면
고요를 열면 무엇이 빛날까
들판의 황소 한 마리
나비로 변하여 날아간다
가슴 열면 무엇이 빛날까
다시 길을 놓치고 돌아가는
풀잎 끝 내 작은 발이 보인다
거지 같은 환상 같은
밟아도 밟히지 않는 세상
상한 한 마리 벌레로 내가 간다
박노해, 흰 모래밭
참 곱기도 해라
이리 보드랍고
해와 바람과 사람이
이렇게 알몸으로 와 뒹글게 하기까지
저 바윗돌
세찬 물살
우르르 우르르
아픈 세월 얼마였으랴
권경인, 나무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야겠다
날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로 아니
때로 사랑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가르친 사람에게 가리라
가구가 되어도 좋고 장작이 되면 또 어떠리
여기 남아 거름이 되든가
어디론가 옮겨져 살게 되어도 상관없으리라
불이 되고 위안이 되고 약이 되는 일
짐이 되고 재가 되고 허공이 되는 일
나는 희망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나를 잊는 것
그리하여 비로소 너를 버리는 것
허영자, 목마른 꿈으로서
흐르는 물소리는
덧없는 생명을 일깨우고
지저귀는 새울음은
허망한 변절을 일깨운다
사랑이여
이 많은
덧없고 변하는 것들 속에서
한 어리석음으로서
목마른 꿈으로서
꿈꾸노니
그대는 오직 하염없고 온전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