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