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자,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끼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이충기, 지울 수 없는 슬픔
오래 오래
지울 수 없는 슬픔
오래 오래
가벼워지지 않는 죄의 무게
오래 오래
누워서 겪는 아픔
세월이 흘러가면
지칠 만큼
오래 오래 흐르고 나면
없어지려나
사라지려나
김재진, 너를 만나고 싶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둔 금 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거나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에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이생진, 떠오르고 지워지고
너는 섬에서 떠오르고
섬은 안개에서 떠오르고
나그네는 수평선에서 떠오르고
섬은 안개속에서 지워지고
너는 세월속에서 지워지고
나그네는 산너머 길에서 지워지고
정영선, 꿈의 모서리가 뭉툭해지는 날은 올까
강진 옛 가마터를 빠져나온 도자기 파편 하나
깨어졌음에도 아직 이름을 달고 있다
'청자상감운학무늬병편'
흙 속에 파묻힐 때 이름도 묻혀
넓은 그늘의 나뭇잎을 틔울 생각에 겨웠을 그
다시 햇빛 속으로 끌려나와
조각난 구름을 타고 날개가 잘린 새가 절름거리는
부서진 몸에 다시 담은 완전에의 꿈
처음 도공은 꿈을 살았으나
나중 꿈이 도공을 살았으리
어떤 천형을 받은 것들은 제 꿈 아니면
남의 것을 덤벙 덮어쓰고 평생 앓는 것을 알겠다
절름거리는 저 새가 실어 나르는
꿈꾸는 자는 죽어도 대대로 살아남는 꿈
올라타고 갈 자를 찾고 있다
고삐를 조일 자를 찾고 있다
꿈에 시달려본 자만이 아는 통증으로
파편의 모서리가 내 가슴을 찌른다
찔리면서도 한 발짝을 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내 꿈의 오리무중을
유리 진열장 속에서 울음을 반짝이는 저 파편이 꿰뚫는다
서 있는 것들이 모두 꿈의 무게로 휘청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