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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허접역사소설 - 도산성의 겨울(제18장 필사즉생 下)
게시물ID : history_181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앗카링카앗
추천 : 2
조회수 : 45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22 23:12:33
159811일 아침 도산성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
 
새해를 맞이하여 축하인사를 올립니다. 주군
 
가토 키요베에가 공손히 절을 하고선 옻칠을 하지 않은 볼품없는 나무 소반을 들고 왔다. 다다미방 상석에는 도산성의 성주이자 조선원정군 우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앉아 있었다.
 
그래. 키요베에 자네도 두루 평안하게나.”
 
가토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오랜만에 부장에게 웃어 보였다. 그는 며칠 사이에 확 야위고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차린 찬이 마땅치 않아 송구스럽습니다. 장군
 
부관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그릇의 덮개를 열었다. 13찬의 간단한 상차림이었다. 195천 석의 영지를 가진 다이묘(중세시대의 지방 영주)가 먹는 아침상치고는 전장임을 참작하더라도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
 
. 유즈케만 있으면 되었다.”
 
가토는 밥을 찻잔에 넣고 끓인 것을 입속에 퍼 넣기 시작했다. 이 당시 유즈케는 밥만 먹고 국물은 남기는 것이 관례였으나, 기요마사는 국물까지 깨끗이 마셔버렸다.
 
말 육회에 말 내장탕에 말 피라. 허허
 
유즈케가 담긴 식기를 내려놓은 그가 상위에 있는 나머지 반찬들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 지었다.
 
주군. 먹기 거북하실지라도 드셔야 합니다.”
 
부관은 장군의 기색을 살피며 음식들을 권했다. 가토는 그런 부하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 피가 든 사발을 들어 올려 그의 커다란 입속으로 쏟아 붇기 시작했다.
 
 
말 피를 한 번에 모두 마신 그는 소반에 그릇을 던지고는 손으로 상을 물렸다.
 
나머지는 먹지 않겠다. 치워라.”
 
장군. 옥체를 보전하시려면…….”
 
키요베에가 입을 열어 다시 권하려 하자, 가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구마모토 정예군들의 사기는 어떠한가?”
 
말고기를 주니 다들 좋아합니다. 히노쿠니 녀석들이라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깐요.”
 
 
히노는 구마모토의 옛 지명이다. 히노국 즉 히노쿠니는 이후 구마모토의 별칭으로 쓰였다. 구마모토의 전 영주 삿사 나리마사가 실정으로 개역 (다이묘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 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그곳을 이어받아 다스리게 되었다. 이 구마모토의 향토 요리가 말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이었다.
 
그래. 성을 지키는 데 있어 현 상황에선 불필요한 생물이다. 마초가 넉넉한 상태도 아니니.”
 
가토는 마초 핑계를 대며 군마의 도살을 긍정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왜성안에 가중된 식량 부족이 애꿎은 말들의 희생을 불러왔음을.
 
.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도니 뭔가 다른 게 먹고 싶구나. 톡 쏘는 겨자 연근이나 달콤한 이키나리 단고(경단)가 당기는군.”
 
 
겨자 연근과 이키나리 경단 모두 구마모토의 지역 음식으로 겨자 연근은 겨자를 연근 구멍에 가득 채워넣고 밀가루에 울금 등을 넣어 노랗게 색을 입힌 튀김옷을 묻혀 기름에 튀긴 다음, 둥글게 썰어서 내는 요리로 허약한 병사들을 위한 보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키나리 단고에서 이키나리는 구마모토 사투리로 갑자기라는 뜻이며 손님이 별안간 집에 들이닥쳤을 때 빨리 내놓을 수 있는 간식을 말한다. 고구마와 단팥을 밀가루 반죽으로 감싸 쪄낸 것으로 구마모토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빠져 시나브로 침을 흘리고 있을 때, 다다미방의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고선 한 노년의 무장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스님 한 명이 다소곳하게 따르고 있었다.
 
가토 공. 식사 맛있게 드셨소이까?”
 
주장에 대한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갑옷을 입은 군감 오타 가즈요시는 성큼성큼 가토에게 다가왔다. 이를 지켜보던 가토 키요베에가 그를 막아섰다.
 
장군. 이게 무슨 무례한 언행이십니까? 예를 갖춰 다시 오십시오.”
 
. 감히 부장 따위가 타이코 전하의 지엄하신 군령을 감시하는 군감에게 예의를 지적하느냐? 썩 꺼지거라!”
 
오타는 가토의 부관에게 일갈하고선 가토의 정면으로 마주 섰다.
 
말고기에 유즈케도 드시고. 어라?. 남긴 음식도 있으시구먼.”
 
군감의 빈정거림에도 가토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타 공.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로 본인을 찾아오신 것이오?”
 
. 내가 왜 왔는지 몰라서 묻소? . 여기서 호의호식하시느라 잘 모르시지.”
 
쨍그랑
 
오타는 그와 가토 사이를 막고 있던 상을 한쪽 구석으로 거칠게 밀었다. 하지만 주장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있던 키요베에 이하 수하들이 달려왔으나,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의 난입을 막았다.
 
보아하니 나에게 무슨 불만 있으신 거 같은데. 허심탄회하게 말씀해보시오. 내 경청하리다.”
 
하하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요? 어찌하여 성을 방어하는 조총병들의 식량을 11(0.18열 홉이 1되가 됨)으로 줄인 것이요? 그것도 나의 군과 모리군 그리고 아사노 군만 말이요!”
 
오타 카즈요시는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의 각반(발목에서 무릎 아래까지 매는 헝겊 띠)을 풀러 그의 맨다리를 가토에게 보여주었다.
 
보시오. 내 공성전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리가 점점 야위어 가는데 각반을 차니 자꾸 발 쪽으로 내려간다오. 워낙 다리가 말라 살이 다 빠지니 마치 대나무 통과 다를 게 무엇이오?”
 
오타 공께서 고생하시는 거 잘 압니다. 허나 부족한 식량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한 것일 뿐. 딴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저의 직속 부하들에게 말을 잡아 먹이는 것은 향후 원군과 협공을 위해서.”
 
 
가토 기요마사가 변명으로 일관하자 분노한 오타 가즈요시는 앞에 있던 다다미를 힘껏 내리쳤다.
 
닥치시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원병을 핑계로 군량 배분에 차등을 두는 것을 내 더는 묵과할 수 없소! 지금 내 병사들은 시체의 피가 섞인 강물을 마시고 종이와 벽의 흙을 끓여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소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면 차라리 조·명연합군에게 다시 사절을 보내어 강화를 하는 게 낫겠소이다. ”
 
군감은 폭언에 가까운 말을 뱉어낸 뒤 가토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요마사는 무릎을 꿇고 의관을 정제한 뒤 부관을 불렀다.
 
키요베에. 할복을 도와다오.”
 
주군!”
 
키요베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말마를 질렀다. 오타는 가토의 돌발행동에 놀라지 않고 팔짱을 끼며 지켜보고 있었다. 기요마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너도 알 것이다. 성주가 성을 지키지 못하고 내주면 그 목도 같이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오타공은 들으시오. 내 목을 적의 총대장인 양호에게 바치고 병졸들의 목숨을 구하시오. 난 절대로 타이코 전하를 배신할 수 없소.”
 
옷섶을 풀어헤친 가토가 수하들에게 명하여 단도와 긴 천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머뭇거리던 부하들은 그의 뜨거운 눈빛을 보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오타 뒤에서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우는 게이넨을 발견하고선 그에게 말을 건넸다.
 
스님도 오셨구려. 내가 이승을 떠나고 나면 나의 흉한 몸을 잘 좀 거두어 주시오. 그리고 이 일을 꼭 기록에 남겨주시구려.”
 
게이넨은 가토의 당부에 합장한 체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장군. 꼭 이러셔야 합니까? 군감 어른 지금이라도 주군을 말려주시옵소서. 제발
 
키요베에는 가토와 오타를 번갈아가며 간절히 청했으나, 두 사람에게서 그가 원하는 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키요베에. 너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이 많구나. 그만 카이사쿠(할복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치는 것)준비를 해라. 오타 공이 이 머리를 들고 가야 하니 목의 가죽의 약간만 남기는 짓 따위는 안해도 된다. 하하하.”
 
장군.”
 
단도와 머리를 받아낼 천이 대령 되자 가토는 칼을 뽑아들고선 아직도 서성이는 키요베에를 쳐다보았다. 결연한 주군의 눈이 그에게 말없이 명령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가토 키요베에. 주군을 모시고 험난한 전장을 해쳐왔습니다. 장군을 먼저 보내드리고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부장은 자신의 결의를 밝히고는 가토의 뒤편에 가서 자신의 왜검을 서서히 뽑았다. 그때였다.
 
장군! 가토 장군!”
 
미닫이문을 열고 젊은 장수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약관의 아사노 요시나가였다. 그도 그동안에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에는 숯검정이 덕지덕지 묻었고 갑옷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왔습니다. 왔어!”
 
무엇이 왔단 말인가?”
 
가토가 단도를 든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들어 아사노에게 물었다. 젊은 장군은 숨을 힘겹게 고르면서 그에게 말했다.
 
원군이요. 원군. 부산성에서 3만의 기병이 그리고 순천에서 2만여 명의 보병이 도산성 부근 30리까지 도달했다고 하오. 여기 전령이 보낸 쪽지를 보시오.”
 
가토는 칼을 내려놓고선 아시노가 가지고 온 종이를 건네받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말없이 오타 가즈요시에게 문서를 준 후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고니시 그자가 이럴 땐 쓸만하구먼. 그래. 그리고 부산과 순천의 왜교성 뿐만이 아니다. 가덕. 안골. 죽도. 양산 등지에서 총 3만의 대군이 길을 잡았다고 한다.”
 
 
당시 왜군들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향한 조·명연합군의 칼날이 자신들에게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연합군의 모든 전력이 울산성에 집중되자 남해안에 구축된 모든 왜성에 대한 전면공세가 아님을 깨닫고는 뒤늦게 구원군을 보냈다. 이는 도산성이 무너지고 그들도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사노 공 이 서신이 참이오?”
 
오타는 일말의 의심을 붙잡고선 아사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밖에 성으로 들어온 전령이 대기하기 있으니 자세한 건 그들에게 하문하시지요.”
 
땡그랑
 
기요마사는 들고 있던 단도를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모두 힘을 냅시다. 그리고 부관은 아랫것들에게 일러 조·명연합군의 진지로 보낼 사신을 뽑도록 하라.”
 
오타 가즈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토에게 말했다.
 
또다시 거짓 항복을 하여 지연전을 펼칠 요량이시오? 협상이 파투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과연 그들이 속겠소이까?”
 
저들도 갑자기 찾아온 한파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요. 이전보다 더 많이 양보하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양호도 마다할 까닭이 없소이다.”
 
가토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군감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소승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장군.”
 
지금까지의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게이넨이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시오. 스님.”
 
가토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발언을 허락했다.
 
적은 지금 물이 가득 찬 찻잔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작은 물방울 하나만 잔에 떨어져도 파도가 일 것이고 그 파고로 인해 잔의 물은 넘칠 것입니다. 제게 하찮은 계책이 하나 있사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게이넨이 다시 합장으로 인사하자 고개를 약간 숙여 예의를 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가토는 승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무엇이 필요하오?”
 
한 분의 장수와 작은 상자 하나면 됩니다. 여기 계신 아사노공께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만.”
 
게이넨에게 별안간 지목받은 아사노 요시나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나 말이오? 이 땡. . 아니 대사께서 나 같은 무장에게 무슨 볼일이 있소?”
 
제가 일러 준 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타이코 전하가 친애하는 조카님의 연기가 필요합니다.”
 
젊은 장군에게 빙그레 웃음 짓는 게이넨이었다.
 
---
 
159812일 낮 도산성 삼지환 부근
 
알았지? 작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알겠사옵니다. 주군
 
아사노 요시나가와 그의 부관이 전방에 돌격하는 적을 바라보며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많은 귀중품이 쌓여 있었고, 아사노의 옆에는 의문의 작은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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