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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WFf5j_0VJTo
이재무, 무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 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안도현, 석류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김응교, 책
씨앗은 몸을 갈라 떡잎을 만들고
떡잎은 비밀을 모아 나무로 자란다
통나무는 무수히 살을 갈라
한 장 종이쪽이 되고
종이는 몸을 벌려 역사를 받아들인다
무거운 역사, 그래서 책은 무겁다
그런데 진짜 역사는
폭풍우의 심장까지 직시하는 잎사귀에 적혀 있거나
잎새 사이를 나는 새의 반짝 숨결에 적혀 있지
진짜 책은 가볍다
황지우, 손을 씻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를 공동정범(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로 손을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유승도, 웃음 짓는 사람
산 속 집에 불이 켜진다
처마 밑에 불빛
숲으로 번져나간다
길 잃은 사람이 불쑥
마당으로 들어서겠다
크고 작은 나방들만 넓고 외로운 빛을 찾아
새까맣게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