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철, 꿈 깨인 새벽
아스라히 잊혀진 사람을
봄 꽃 마주치듯 만난 꿈을 깨인 새벽
잠시 고운 그 얼굴 입김 부어 떠올리네
완강한 세월에 떠밀려
깊은 골짜기 너머 호젓이 핀
산수유꽃 같더니
꿈길로 나그네 되어 찾아와
흘러가버린 세월의 뒤만 덧없이
밟고 가는가
꿈 깨인 새벽에 듣는
어디선가 고운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 소리
허형만, 고여 있는 강이
고여 있는 강이
흔들린다
다 썩어가는 수초들도
온몸으로 일어서고
한가롭게 노닐던
햇살
일제히 날아오른다
마침내
보인다 그리도 아득하던
삶의 길
고여 있는 강이
흐르기 시작한다
심연의
실핏줄까지 데리고
김재진, 햇살 이야기
모든 것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날
반짝이는 햇살이 다가와 아니라고 말했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니
아무것도 잃을 것 없다고
어깨에 앉은 햇살이 내게 아니라고 말했네
황지우, 너무 오랜 기다림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이성선, 백담사
저녁 공양을 마친 스님이
절 마당을 쓴다
마당 구석에 나앉은 큰 산 작은 산이
빗자루에 쓸려 나간다
산에 걸린 달도
빗자루 끝에 쓸려 나간다
조그만 마당 하늘에 걸린 마당
정갈히 쓸어놓은 푸르른 하늘에
푸른 별이 돌기 시작한다
쓸면 쓸수록 별이 더 많이 돋고
쓸면 쓸수록 물소리가 더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