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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귀향의 노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짐짝 위에
아직 겨울 찬비가 줄기차구나
저기가 내 그리운 귀착지
머나먼 여정을 달려온 나의 말이여
마중 나온 북한산이 다가와
이제 무릇 날개를 접으라 한다
마중 나온 관악산이 다가와
이제 응당 말을 놔주라 한다
속에서 시가 넘쳐흘러도
받아쓰지 않을 용기를 가지라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내 푸득이는 어깻죽지를 더욱 작게 접어
고요의 평원에 착륙할 수 있을까
오랜, 도지는 신병 같은 내 말의 허기증을
뒤쪽으로 꾹꾹 눌러둘 수 있을까
도도한 저녁 숲에 상수리나무들이 젖고 있구나
내 자손만대도 젖고 있구나
여기가 내 사무치는 귀향지
방울소리 설렁대는 나의 말이여
동행하는 안산이 나더러
이제 그만 상처를 싸매라 한다
동행하는 반월평야가 나더러
이제 그만 역마살을 동여매라 한다
한동안 눈 맞으며, 눈 맞으며 살자 한다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속에서 넘치는 말을 받아
눈그늘 깊게 하는 술 한 동이 빚을 수 있을까
향내 진진한 술 한 잔 받쳐들고
나는 너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신동엽, 좋은 언어(言語)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에서 머리로
속속들이 굽이돌아 적셔보세요
하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한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장석주, 바람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몇 개의 길들이 내 앞에 있었지만
까닭없이 난 몹시 외로웠네
거리엔 영원불멸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달리고
하늘엔 한 해의 마른풀들이 떠가네
열매를 상하게 하던 벌레들은 땅 밑에 잠들고
먼 길 떠날 채비하는 제비들은 시끄러웠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의 바쁜 발길과 웃음소리
뜻없는 거리로부터 돌아와 난 마른꽃같이 잠드네
밤엔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나
오랜 달빛 흩어진 흰 뜰을 그림자 밟고 서성이네
여름의 키 작은 채송화는 어느덧 시들고
난 부칠 곳 없는 편지만 자꾸 쓰네
바람은 저 나무를 흔들며 가고
난 살고 싶었네
김동리, 패랭이꽃
파랑새 뒤쫓다가
들 끝까지 갔었네
흙 냄새 나무 빛깔
모두 낯선 타관인데
패랭이꽃
무더기져 피어 있었네
이형기, 길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