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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옥, 뿌리
나무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 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 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윤동주,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유하,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꽃시절을 세상에 바치고
자기 내부로 꽃을 피웠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무화과 꽃차례 속으로 들어가
나무에게 꽃가루를 전하고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생을 마치는 꿀벌들처럼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한 사람들
무화과 나무에 기대어
별똥별의 길과
그 별똥별의 편도를 따라 가버린 이들이
마침내 피워낸
보이지 않는 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용혜원, 전화 대화
나의 연인이여
사랑하는 사람아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지 않습니까
"나야" 하고서는
왜냐고 물으면
"그냥 보고 싶어서"
대답하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있으면
어찌 합니까
"무슨 일 있는 거야?"
물으면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대답하고는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사랑해 잘있어 이 말을 하려고 했어"
하는 그대
우리는 때로
마음만 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은 이래서 하고픈 것입니다
사랑은 이래서 빠지고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