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눈의 눈
봄이 가까워질수록
눈은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햇빛이 시려워 시려워서
피워놓은 눈꽃을 자꾸만 꺼뜨리며 따라오는
햇빛의 눈을 피해
눈은 음지로 음지로 숨어든다
누구도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쫓기지 않고서는 오를 수도 없었을 산정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겨우내 연기 한번 피우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바위틈에 간신히 서려 있다가
점점 잦아들어, 마침내
훅 꺼져버린
눈의 눈
시린 물
흘러내리는 이른 봄마다 나는
눈 어두워 알지 못했네
그것이 한 은둔자의 피라는 것을
박흥식, 우리가 별이었다면
우리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 아니고
시린 저 하늘 끝 눈물겹게도 쟁쟁한 설움이었다면
울긋불긋한 가을날
추수를 끝낸 논바닥에 흩어져 시끌벅적하게 놀아도 좋은 참새떼였더라면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먼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면
우리가 사람이 아니고
어차피 반짝이거나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꽃 피거나 꽃 지거나
여러 숱한 터울에도 고스란한 씨앗의 씨앗으로 보듬을 수 있었다면
별이었다면
아, 우리가 결코 사람이 아니고
슬픔이나 기침, 가난이나 두려움이었더라면
조태일, 이슬 곁에서
안간힘을 쓰며
찌푸린 하늘을
요동치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저 쬐그만 것들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
오탁번, 그대의 별자리
비상등 켜고 전조등 밝혀도
그대가 가는 길 보이지 않는다
네거리에 가까스로 왔지만
직진해야 하는지 우회전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황도 십이궁도 광막한 어둠에 싸여
전갈자리인지 사자자리인지
북극성 곧바로 보이는
오리온자리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
길은 뚫린 곳에서 스스로 막힌다
내 생애의 길은
저 혼자 시간의 강물로 빠지며
내 마음의 길을 지워버린다
이형기, 이월(二月)
어둡고 먼 곳에서
꿈같은 것이 피었다 지는 달 이월(二月)
삼십대 미망인의 창변에
잠시 깃든 마음의 공백
이월(二月)은 그이보다 먼저와
그이를 기다리는 찻집의 난롯가
또는 서로 외면한 채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사람끼리
어색한 마음새
행로에 차고 맑은 바람 불 때
이월(二月)은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곳에서
아직도 희끗 희끗 눈 내리는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