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임, 동화가 있는 풍경
아기나무가 엄마나무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왜 새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햇살이나 물이 될 수 없나요
너는 날마다 키가 크는 감옥이야
아무나 그런 감옥이 될 수는 없단다
그럼, 키가 커서 난 무엇이 되는 거죠?
넌 의자도 될 수 있고, 조각품도 될 수 있단다
하지만 난 어디에든 갈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그런 것들이 되어보렴
오랫동안 한곳에
생각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세상의 무수한 갈랫길들이
환하게 보인단다, 그때에는
넌 어디에나 갈 수 있을거야
정호승, 술 한 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이하석, 나는 망가진
나는 망가진 풍경이다 언제나
지난 밤의 어둠이 남아있는 구석을
내 몸과 방에 갖고 있다
나는, 내다보는
갇힌 풍경이다 나는
끝난 풍경이다 나는
차갑게 반영하는, 투명한
풍경이다 누가, 들여다본다
나는, 풍경이 아니다 바깥을 향한
뜨거운 눈이다
이태수, 새에게
새야, 너는 길 없는 길을 가져서 부럽다
길을 내거나 아스팔트를 깔지 않아도 되고
가다가 서다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디든 날아오를 때만 잠시 허공을 빌렸다가
되돌려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길이 너무 많은 길 위에서
새야, 나는 철없이 꿈길을 가는 아이처럼
옥빛 허공 깊숙이 날아오르는 네가 부럽다
나희덕, 빈 의자
나는 침묵의 곁을 지나치곤 했다
노인은 늘 길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안경 너머로 무언가 응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이따금 새들이 내려와
침묵의 모서리를 쪼다가 날아갈 뿐이었다
움직이는 걸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몸 절반에는 아직 피가 돌고 있을 것이다
축 늘어뜨린 왼손보다
무릎을 짚고 있는 오른손이 그걸 말해준다
손 위에 번져가는 검버섯을 지켜보듯이
그대로 검버섯으로 세상 구석에 피어난 듯이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다는 일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필사적인 증거였다
어느 날 그 침묵이 텅 비워진 자리
세월이 그의 몸을 빠져나간 후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빈 의자에는
작은 새들조차 날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