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만하, 창(創)에 대하여
옥편을 뒤지면
비롯할 창이다
옥편 풀이와는 달리
창(創)자에는 상처란 뜻도 있다
창상(創像)이란 의학용어로도 쓰인다
창조와 상처가
한 글자 안에 동거하고 있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상처 입는다
한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날개를 다친 새는
더 멀리 날기 위하여
다시 어둠의 벼랑을 탄다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친 다음날
섬의 벼랑 아래 떨어져 있는
수많은 바닷새의 흰 주검들을 보라
고흐의 해바라기가 내뿜는 불꽃의
눈부신 암흑을 보라
기원전 십수세기
은나라 유적에서 발굴되는
뼈에 새겨진 최초의 기호가
태어날 때의 아픔을
글자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창조하는 정신은 언제나
피를 흘린다
박노해, 나는 젖은 나무
난 왜 이리 재능이 없을까
난 왜 이리 더디고 안될까
날마다 안간힘을 써도
잘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나는
나는 젖은 나무
젖은 나무는
늦게 불붙지만
오래 오래 끝까지 타서
귀한 숱을 남겨 준다고 했지
그래 사람이 무슨 경쟁이냐고
진실에 무슨 더디고 빠른 것이 있냐고
앞서가고 잘 나가는 이를
부러워 말라 했지
젖은 나무는 센 불길로 태워야 하듯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맹스레 정진할 뿐
젖은 나무인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긴 흐름으로 치열하게 타오를 뿐
강은교, 너는 던져졌다, 거기
아니 여기 말고, 거기
아니 거기 말고, 여기
아니 여기 말고, 저 가운데쯤에
아니 거기 말고, 저 가운데의 가운데쯤에
아니 거기 말고, 그 구석에
아니 거기 말고, 그 구석의 가장자리쯤에
떠나면서, 떠나지 않으면서
가장자리의 중심에
중심의 가장자리에
중심에
너는 던져졌다, 거기
오세영,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 설 때를 알 듯
박정만, 작은 연가(戀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 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