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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13년 봄.
게시물ID : readers_159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ompany
추천 : 0
조회수 : 3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21 03:28:21
 
오월의 햇살은 아직 남아있던 겨울의 발자취를 지우는 듯, 따사롭게 비추기 시작했다.
서울 어딘가의 마천루부터, 서울 어딘가의 달동네까지, 오월의 햇살은 봄을 불러온다.
 
서울 어딘가의 어두운 방, 김은 오전 늦게 침대에서 일어난다. 오월의 해살은 눈 부시게 뜨겁건만 김의 방에는 소름끼치도록 어두운 정적 뿐이었다.
방에는 쌓인 빨래더미, 술병들이 어질러져 있을 뿐이다.
김은 서서히 일어났다. 침대에 멍하니 앉는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다.
계속 집에만 있으려 했으나, 벌써 일주일동안 밖에 나가보질 않았다. 김은 일어나서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여니 오월의 햇살이 내려쬔다.
김은 문득 이 조그마한 사치를 누려보고 싶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는 욕실로 향했다. 김은 비록 젊은이었으나,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자신보다 스무 살은 늙어보이는 것이었다.
벌써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깎아 볼까. 그렇게 생각한다. 일회용 면도기는 벌써 다 써 버렸다.
그는 천천히 머리 옆의 선반을 손을 쓸기 시작했다.
아프다. 손가락에 찌릿한 느낌이 온다.
김은 손가락을 들어 본다. 손가락에서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는 선반 그 위치에 면도날이 있음을 깨닫는다.
피가 묻은 면도날을 보며, 김은 어떠한 감상에 빠져든다. 그것은 오월의 햇살에 대비되는, 아직 김의 집을 감싸고 도는 겨울의 추위다.
김은 면도날을 살짝 인중,턱,목에 대본다. 그리고 이내 굳이 자기가 단정하더라 하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기에, 수염 정리를 포기한다.
뼛속까지 시린 찬물로 샤워한 다음, 그는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옷을 입는다. 목 부분에 누렇게 때가 탄 흰 와이셔츠, 검은 양복바지.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비록 그는 편한 티셔츠, 청바지가 있었으나, 오늘은 그러지 않기로 한다.
 
뒤축이 눌린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자, 문득 두려운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김은 아직 오월의 햇살을 받아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의 집의 겨울이 그를 아직 놓아줄리가 없다.
김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천천히 걸어서,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 정류장, 녹이 슬은 이정표를 김은 훑어본다.
일산 행, 좋은 도시이긴 하지만 김은 내키지 않았다.
강남 행, 김은 '여기로 갈까'하는 생각을 하다, 이내 마음을 접는다.
광화문 행, 김은 어쩔수 없이 광화문 행 버스에 몸을 싣었다.
 
버스 한 구석 창가자리에 앉은 김은 밖을 응시한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서울 시내로 향한다.
밖에는 오월의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들이 나온 가족, 사랑을 속삭이며 걸어가는 연인들...
그렇게 한참을 창밖을 보고서, 김은 아직도 광화문은 여러 정거장 남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은 친구가 별로 업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그럭저럭한 대학을 나왔지만, 남들 다 해본다는 연애도 못해본 것이 그의 대학생활이다.
한동안 가족과 같이 살았던 김은, 취직이나,여자 관계에 대해 캐묻는 가족을 피해 도망나온지 벌써 몇 달이 되어간다.
 
그렇게 어떠한 생각을 하면서, 버스는 광화문에 도착했다.
김은 버스에서 내렸으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에 대한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는 광장 한가운데 있는 벤치에 앉는다. 앉아서 햇볕을 쬘 작정이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김은 갑자기 사람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행인들, 줄 잡힌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 맨들 사이에서, 김은 헤진 와이셔츠 뿐이었다.
 
김은 벤치에서 일어나, 청계천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는 청계천 구석에 앉아 개천 바닥에 발을 적신다.
김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흐르지 못하고 침전 하고 있느냐..?
어느 친구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 벌써 여우같은 부인에 토끼같은 자식들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김은 어느 것도 없었다. 직장은 번번히 고배를 마실 뿐이고, 여자는 말할 것도 없다.
햇살에 데워져 따뜻했던 냇물은, 김은 갑자기 차갑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김은 다시 일어나, 교보문고를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광장 지하의 전시관 또한 기웃거리기를 오래,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김은, 문득 술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대로 술집으로 가던 그 골목에서,
김은 나를 만났던 것이다.
 
나는 김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만나기에는 껄그러워지는 상대였다.
그 동안 김을 몇번 만났지만, 요즈음에는 "바빠서.."라는 핑계로 이리저리 만남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그 곳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나는 어떠한 불안감도 들었고, 또한 어떠한 반가움도 느꼈다.
김은 나에게 "시간 있으면 한잔 하지." 라고 무뚝뚝 하게 말했다.
나는 피해 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가장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을 별로 못 마시기에, 나는 소주 몇 잔을 받고 잔을 물렸고, 김은 나와 반대였기 때문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나를 앞에 두고
소주병을 하나 하나씩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
 
김이 소주병 두 병을 비우기 시작했을 즈음, 안절부절 못하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김은 술잔을 비우다 말고 어떠한 흔들리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직장 알아보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서는 김은 술잔을 비웠다.
 
"요즘은 경기가 안 좋잖아, 우리 회사에서도 구조조정이 들어갔다구, 우리 매니저는 어제 잘렸어, 힘들게 공부하고, 대학 나와서, 일을 잡으면 뭐하나,
결국에는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뎅겅뎅겅 잘리는데."
나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김은,
"그래도 일을 한다는게 좋은게 아닌가? 나같은 사람들도 여럿 있다구." 라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래, 가끔은 나도 네가 부러워, 자네처럼 아무 것에도 묶여있지 않고 떠다니고 싶다구. 하지만 그러기에는 말뚝을 너무 깊게 박았지."
"너는 말뚝이라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건 너의 이정표다. 너는 이정표가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어. 이런 떠다니는 것이 기쁜 것인가?"
나는 더이상 말을 할수 없었다. 그리고서는 그 이후부터는 김의 말을 듣는 체 마는 체 하면서 이 만남이 어서 끝나기를 바랬다.
 
소주를 다섯 병째 비우던 순간, 김이 말했다.
"그만 일어나지."
그리고 카운터로 계산서를 들고 걸어가던 김을, 내가 가로막았다.
"이 사람아, 내가 쏘는거야, 나중에 취직하면 거하게 쏘라구."
라며 계산서를 빼앗아 가던 나를, 김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나와 얼마쯤 걸었을까, 두갈래길이 나왔다.
"다음에 또 보자, 연락하고." 나는 그런 다음 가로등이 이어진 길을 무언가에 쫒기듯이 걸어갔다.
김은, 그 반대편에, 고장나버린 가로등 하나 있는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김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겨울의 추위가 다시 그를 덮쳐 온다. 방 안은 끔찍할정도로 고요하다.
바닥에 쌓어 있는 은 전공 서적들, 영어 책을 사이에, 김은 색이 바랜 시집 하나를 찾는다.
아무 페이지나 찾아서 읽어 본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
 
다른 쪽을 펼쳐 본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집을 책 더미 사이에 쑤셔 넣고,
색 바랜 와이셔츠를 벗고, 다시 욕실로 들어간다.
피가 엉겨붙어 있는 면도칼이 아직 있다. 손가락도 아직 쑤시다.
 
거울 건너편의 면도칼을 든 남자에게서, 어떠한 신념이 보인다.
김은 면도칼을 점점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댄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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