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고슴도치 사랑
서로 가슴을 주어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말라
소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행복할 수 있었네
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함민복,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러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김소월, 새벽
낙엽(落葉)이 발이 숨는 못물가에
우뚝우뚝한 나무 그림자
물빛조차 어슴푸레히 떠오르는데
나 혼자 섰노라, 아직도 아직도
동(東)녘 하늘은 어두운가
천인(天人)에도 사랑 눈물, 구름 되어
외로운 꿈의 베개, 흐렸는가
나의 임이여, 그러나 그러나
고이도 붉으스레 물 질러 와라
하늘 밟고 저녁에 섰는 구름
반(半)달은 중천(中天)에 지새일 때
최영철, 20세기 공로패
너에게 상을 준다
반반한 길 대신
울긋불긋 허물어진 길 남겼으니
세상의 등불 꺼진 막다른 골목 돌아
두 다리 강건해졌으니
새길 위로 펑펑 폭탄 터지고
무너지 폐허 위로
다시 펑펑 폭죽 퍼지며
그 시간 따라 울다 웃다
내 가슴 마를 날 없었으니
고맙다 밤이여
어둠으로 날이 밝고
눈물로 값싼 환희를 덮었으니
때로 망연한 나를 찌르고
때로 희희낙락한
나를 엎었으니
사랑과 평화의 노래 두고
이별과 절망의 탄성 지르다가
낡은 기타 몇 가닥 끊어졌으니
길 없는 길
가락 없는 청맹과니의 고개 넘어오며
나 비로소 득음했으니
너에게 상을 준다 20세기여
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
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