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필사즉생
1598년 1월 2일 아침 도산성 인근 조·명연합군 진지
“자. 오늘은 누가 선봉에 나서겠는가?”
제독 마귀의 군막 안에서 그의 직속 부하 지휘관들이 모이는 조회가 시작되었다. 마 제독은 말을 꺼내며 여러 장수를 한 명씩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하들은 상급자의 눈빛을 피하기 급급했다. 갑자기 찾아온 동장군과 계속된 공성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태의 군사를 이끌고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으로 돌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파에 적응된 요동의 마군이 주축이 된 북군이 사정이 나았기에 이번 공격은 다시 마 제독 휘하의 군졸들이 떠맡게 되었다.
“허…. 이래서야 요동벌판을 주름잡는 정예 마군이라고 누가 보겠는가? 정녕 자원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인가? 쯧쯧.”
마귀는 혀를 끌끌 차면서 좌중을 다시 노려보았다. 천막 위 허공을 보거나 탁자 아래 발끝을 보는 자가 속출했다. 그때, 제독 마귀로부터 멀리 떨어진 말석에서 조선어가 들려왔다.
“제독 각하, 제가 가겠습니다.”
마 제독은 급히 통사를 부르고는 조선말을 한 남자를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호오. 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김응서 공이….”
마귀는 30대 중반의 조선 장수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그가 입공자효 (공을 세워 속죄하는 것)의 처분을 받고선 방황하고 있을 때 그의 휘하로 들였다. 별장이란 낮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김응서는 여러 번 공을 세웠다. 며칠 전만 해도 물을 길으러 왜성 밖으로 나온 적군을 투항시켜 경리 양호에게 크게 상찬받은 인물이었다.
“장군. 미관말직인 소인에게 선봉장의 기회를 베풀어 주신다면 이런 광영이 또 있겠나이까?”
별장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마귀에게 군례를 올리며 선봉에 세워달라고 청을 넣었다.
“공이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내가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오. 앞서 나아가 그대의 용맹을 떨치도록 하오. 내 달자들과 정예 명군들을 딸려 보내 주리다.”
마 제독 김응서에게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 광경을 본 몇몇 명나라 장수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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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영감. 어찌하여 사지로 나서시는 겁니까?”
김응서의 선봉출전 소식을 듣고 온 첨지 중추부사 김충선이 다짜고짜 그의 막사에 뛰어들어 따져 물었다. 별장은 희미하게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선 그를 맞이 했다.
“첨지사 영감. 소장은 이제 영감이 아니라고 몇 번 말씀 드렸습니까? 그리고 나라에 죄를 지은 몸으로 공을 세워 죄를 씻는 기회가 왔거늘 어찌 사지라고 잘라 말씀하십니까?”
“지금은 공성 초반의 기세 좋던 명군이 아닙니다. 예전의 오합지졸이었던 상태보다 더 못합니다. 저런 요동 촌뜨기 찌끄래기들을 데리고 왜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습니까? 영감. 선봉장은 재고해보시는 게….”
항왜장이 그를 걱정하며 선봉에 서지 말 것을 애원하자 김응서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내 예전처럼 그대를 대하겠소. 충선아. 나를 막지 마라. 이것 또한 운명이 아니겠느냐? 장수는 무릇 전장터에서 영예롭게 죽어야 그 공이 자손 대대로 빛나는 것이다.”
“그 무슨 아니 될 말씀이시오? 제가 임진년에 수하들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하여 장군을 함께한 세월 동안 아버님으로 생각하고 모셨거늘 아버지가 죽기를 자청하는데 말리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소이까?”
김충선은 애끊는 심정을 토로하며 소리쳤다.
가토 기요마사의 우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한 사야가 즉, 김충선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강화서(자신의 투항의사를 밝힌 글-이 문서에서 김충선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내보였다.)을 보내어 항복했지만, 이후 경상도 방어사 김응서의 휘하에서 활약한다. 김응서는 항왜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는데, 일례로 그는 의흥 현감 노경복이 투항한 왜인 3명이 자신의 고을을 지나가자 2명을 죽인 사건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의 치죄를 주청하여 항왜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 노력하였다. 우참찬이었던 이항복은 선조를 인견한 자리에서 김응서에 대해 평하길 “왜노를 부리기를 마치 떡으로 아이를 꾀듯이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항왜들과 김응서는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였다.
“충선아. 나를 그리 살뜰히 생각하였다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허나, 옛말에 이르기를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라고 하였다. 네가 조선의 아름다운 유풍을 쫓아왔으니 충성의 도리는 알 것이라 본다. 더는 나를 막지 말아다오.”
“영감….”
김충선의 떨리는 목소리를 그를 부르자 김응서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는 막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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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 공격하라!”
“와 아아!”
김응서가 이끄는 명나라 마군이 왜성을 돌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한 상급을 약속한 오랑캐 용병들이 그를 따라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력인 명의 북군들은 선봉에서 떨어져 함성만 요란하게 지르며 돌격하지 않고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적의 조총탄이 비처럼 쏟아질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탕탕탕”
명군의 예상대로 요란한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적이 내지르는 괴성이 아니었다. 총성은 김충선이 이끄는 항왜 조총부대가 돌격하는 김응서와 군병들을 엄호하는 소리였다던 것이다.
“적의 기세가 꺾였다. 성벽 위로 줄을 걸어라.”
어느새 성의 코앞까지 도착한 김응서의 무리는 왜성을 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툭”
성에서 무언가가 그들에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병졸들이 적의 투석이라 생각하고는 방패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그들이 떨어진 것을 보니 금은보화와 종이서류가 든 궤짝이었다. 놀란 병졸들이 성위를 바라보자 그 위에서 지휘하던 젊은 왜군 장수와 군사들이 비단 더미를 아래로 던지기 시작했다. 달자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눈앞에 보물이 보이자 공성은 관두고서 너도나도 재화를 취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놈들아! 적의 간계에 속지 마라!”
당황한 별장 김응서 군사들에게 독전을 명하였으나, 소귀에 경읽기였다. 심지어 뒤편에서 지켜만보고 있던 명군까지 보물쟁탈전에 뛰어들어 아군끼리 보화를 뺏고 빼앗는 추태를 보였다.
“탕탕탕”
김응서의 마군이 지리멸렬해질 때 즈음 왜성에서 총성이 울렸다. 적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방어태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명군들이 하나둘씩 총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공성은 또다시 허무하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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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버러지 같은 별장 놈아! 우리 군의 명예에 먹칠하고선 패주를 해?”
마 제독의 군막에서 험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상석에 앉은 마귀의 노한 목소리였다. 휘하 장수들은 2열로 늘어선 채 서 있었고, 열의 중앙에는 별장 김응서가 무릎을 꿇고선 앉아 있었다.
“패장이 무슨 변명이 있겠소이까? 다만 군졸들이 소장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
“닥치거라. 너의 어리숙한 지휘로 인해 아까운 천군 100여 명이 죽었다. 이는 씻을 수 없는 대죄이다.”
분노한 마귀는 막사 내에 거치해둔 자신의 보검을 뽑아 그에게 다가갔다.
“나 제독 마귀가 이 오만방자한 놈을 직접 베어 군령의 준엄함을 모두에게 보일 것이다.”
마 제독이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선 검을 높이 올렸다. 김응서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깐. 멈추시오.”
전령하나가 막사 문을 열고선 황급히 달려왔다. 경리 양호가 보낸 자였다. 그가 서신을 마귀에게 주니 안에는 양호와 첨지 부사 김충선이 쓴 글이 두 장 들어있었다. 양 경리의 서찰은 「항왜장 김충선의 말을 믿어 보라.」 간단한 글이었고, 김충선이 보낸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마 제독 각하. 이경(밤 9시에서 11시 사이)이 될 때까지 제가 적의 목을 잘라 올 테니 별장 김응서의 죄를 사면하여 주소서. 적의 수급은 천군의 희생자보다 절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제독 마귀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으로 해시가 될 때까지 처형을 미루었다. 과연 약조한 시각이 되자 피 칠갑을 한 김충선 이하 항왜 100여 명이 적의 수급을 두둑이 가지고 돌아왔다. 이 때문에 김응서는 무사히 마 제독의 군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말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김충선에게 김응서가 물었다.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것인가?”
김충선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영감께서 그러지 않았소? 사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