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꽃 핀 나무
하루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그리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사람의 마음이 꽃 핀 나무로 서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기쁨을 그의 마음 속에 심어야 한다
지나오면 모두 어제가 되고 작년이 되는
이빨 속에 무참히 뜯긴 시간들
봄을 따라가던 맹목의 가을이
잘못 든 길에서 얼굴 붉힌다
그것이 세월이다
그러나 한 다발의 기쁨으로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는
쓸쓸함의 계단을 딛고 올라
꽃 핀 나무의 열렬함으로 하루를
꼿꼿이 세워야 한다
내가 사랑했던 나무와 네가 사랑했던 나무의
빛깔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이 한 해다
세상은 어두워도 꽃 핀 나무의 마음은
혼자 환하다
이성선, 별을 바라보는 우물
사막 작은 나무 곁의 별 아래서 몸을 오그리고 잠을 잤다
옆에는 모래밭을 헤매며 풀을 뜯는 염소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다
낮에는 몰랐으나 밤에 우물은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내가 누워 눈을 감은 동안에도 우물은 혼자 눈을 뜨고 있었다
사막이 다 잠든 뒤에도 우물은 깨어 별을 바라보았다
잠들지 않은 내 귀가 우물 속으로 별이 퐁당퐁당 빠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물 속에 내려와 떠드는 별들의 소리도 들었다
하늘의 염소가 물을 마시러 내려와 별 사이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다음날은 그곳을 떠났지만
나는 그 후로 내 마음의 사막 한곳에
밤이면 깨어 눈을 뜨고 별을 쳐다보는 우물 하나를 갖게 되었다
곽재구, 타클라마칸 사막
버스를 타고 끝없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리다 보면
차창 밖 어디에고 신기루 피어납니다
오아시스 마을 지나온 지 불과 이십 리 지도에는
앞으로 하룻길 더 달려야 새 오아시스 마을에 이른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평선 어디에건 오아시스 마을 자리하지 않은 곳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 향한 내 마음이 신기루와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저 광활한 사막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
그 어디에도 그대 향한 내 그리움 스며들지 않은 곳 없습니다
김용택, 겨울 강가에서
너와 나란히 서서
꽝꽝 언 얼음 위에
돌을 던진다
얼음은 하얗게
멍이 들고
돌은 소리를 죽이며
강기슭에 가 닿는데
강은 얼마나 깊은지
강은 세상으로
얼마나 깊이 흐르는지
산이 운다
산이
울어
유승도, 내 몸에 눈송이들이 내려앉을 때
눈이 내 어깨에 머리에 내려앉으면
나도 눈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을까
움직임 없이 자리에 서서 눈을 맞으면
내 몸에도 눈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저 눈 내리는 저녁 들판에 나아간다면
나도 눈꽃이 될 수 있을까
눈이 내리면 나는 왜 이다지도 눈꽃을 피우고 싶은가
자신의 몸 위에 함박스런 꽃을 피우는
나무와 풀과 바위가 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