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낙화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신 큰스님을 다비하는
불꽃인가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도종환, 맑은 물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준다
만산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더 쓸쓸하지도 않게 보여준다
더 많이 들뜨지 않고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안도현, 연애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사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김광규, 그리운 세상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아마도
그 세상이 있겠지
온갖 꽃과 나무들 뒤섞여 큰 숲을 이루고
사람과 짐승이 같은 물을 나누어 마시고
쓸 만큼 돈을 벌어서
편리한 기계를 함께 부리며
모두가 사이 좋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
언제나 꿈꾸면서도
아직껏 가보지 못한
그 세상 그리워
벌써 몇 번째인가
신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했건만
내가 찍은 후보는
번번이 떨어졌네
기형도, 허수아비
밤새 바람이 어지럽힌 벌판
발톱까지 흰, 지난 여름의 새(鳥)가 죽어 있다
새벽을 거슬러 한 사내가 걸어온다
얼음 같은 살결을 거두는 손
사내의 어깨에 은빛 서리가 쌓인다
빈 들에 차가운 촛불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