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들길
아무도 없는 길 혼자 달려왔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몸 더럽히지 않고 왔습니다
나무들이 신선한 손 흔들어 축복해 주는 길 위로
새들의 마중 받으며 햇빛처럼 걸어왔습니다
물소리도 바람소리도 음악이었습니다
구름과 놀은 어찌 화려한 옷 아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쓸쓸하지만
때로 쓸쓸함도 아름다움인 줄 알았습니다
갈 때는 몰랐지만 돌아올 땐
몇 송이 풀꽃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의 삶도, 맞아야 할 내일도 매양
그런 것이겠지요
나 오늘, 이 들길 걷다가 깨달았습니다
기다림 끝에 밤도 오고, 밤 지나 햇빛 오듯이
기다림 끝에 환한 희망 하나 넘실대며 온다는 것을
그러니 들길이여
너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를 밟고 간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
나 또한 잎 진 나무처럼 기다리고 있으니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압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지성찬, 고독해 보면
새어드는 검은 고독이 가슴까지 차오른다
생활의 주머니도 가랑비에 모두 젖었다
물기를 꾹 짜서 다시 입는다
일기예보는 오보(誤報)였다
고정희, 묵상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 앉아
그대 계신 쪽 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김왕노, 너를 지나치다
혹시 너였을지 모른다
나 시들지 말라고 한 때
나에게 종일 내리던 비가
파초 잎에 후둑이며 희망을 연주해 주던 비가
혹시 너였을지 모른다
하늘 저기 저편에서 흘러와
내 창가에 빛나던 별들
스스로를 태워 빛나던 별들
그리고 은하수
혹시 너였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돌아와 나 상한 몸 상한 마음으로 흐느낄 때
함께 밤새 울다 부리가 피로 물든 새
전생에 상처 입었던 새
오늘도 누군가를 비껴왔다
부딪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며
먼 길을 돌아 혹 너일지도 모르는데
습관처럼 황혼의 집에 이르렀다
붉게 물든 낙엽 등불처럼 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