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김윤희, 약에게
비상처럼 고고한 약들도 어찌
밥이 필요치 않으리
집의 약장 속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두 눈 빛내며 숨죽이고 배고파하고 있는 암흑의 약들
너의 친절한 밥이 되어 주겠다
이미 늙어버려 효능이 어떨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허리디스크
최근의 관절염까지
나는 그리 싱싱한 먹이가 되지 않는 줄은 알지만
약 너에게 나를 바친다
뼈는 뼈대로 피는 피대로
내 모든 불량(不良)을 오늘은
통째로 너에게 먹인다
내가 앓고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을 너에게 바친다
너의 끝없는 욕망 앞에 백기를 든다
김경미, 청춘이 시킨 일이다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시외버스가 시키는 일이다
철물점의 싸리 빗자루가 사고 싶다 고무호스도 사서
꼭 물벼락을 뿜어 주고픈 자가 있다
리어카 위 가득 쌓인 붉은 육고기들의 피가 흘러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 그렇게
서로를 만들고 짓는 것도 청춘이 시켰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찼던 그때
하늘에 일 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달력이 가득했던 그때
모든 게 푸성귀 색깔이었던 그때
구름을 뜯어먹으며 스물세 살이 가고
구름 아래 속만 매웠던 스물다섯 살도 가라고 청춘이 시켰다
기차가 시켰다 서른한 살도 청춘이 보내버리고
서른세 살도 보내버리니 다 청춘이 시킨 것이었다
어느덧 옷마다 모조리 불 꺼진 양품점 진열장 앞
마네킹들이 물끄러미 바깥의 감정들을 구경한다
다투고 다방 앞 계단에 쪼그려 앉은 감정
기차를 끌고 지나가는 감정, 한쪽 눈과 발목을 잃은 감정
공중전화 수화기로 목을 감는 감정
그 전화 끊기며 내 청춘이 끝났다는 것도 청춘의 짓이다
아직도 얼른 나가보라고 지금도 청춘이 시킨다
지금이라도 줄을 풀라고
기차와 시외버스와 밤과 공중전화가 시킨다 여전히 청춘을 시킨다
노두식, 아버지의 거울
두 아이를 무동 태우고 살면서
발에 밟히는 세상이
만만찮은 풍랑임을 알았다
내 아이처럼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나도 별을 만지며 놀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수평이었고
수평의 맑은 거울이었다
그 시절 발아래에선
천지개벽 같은 태풍도 불었음직하건마는
거울 밑에 감추어 둔
아버지의 한쪽 세상을
까막눈이 나는 오래도록 몰랐었다
어깨의 물매가
뜬금없이 기우는 날이면
나는 내 아이보다 아버지를
아버지의 거울을 그래서
쓸쓸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차한수, 그대는 아는가
그대는 아는가
눈물은 바다를 밟고 온다는 것을
발자국마다 일어나는 하얀 그림자는
지난날의 젖은 이야기로 남아
바람에 밀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가
언제나 가쁜 숨 헐떡이며
떠다니는 작은 물새는 풀피리 같은
노래 한 가닥 남기고
오늘도 노을 깊이 빠져드는 발자국 밟으며
가고 있는 날개짓을
그대는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