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소동이 끝난 뒤 세 사람은 말없이 각자 앞의 우물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울이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상관인 여여문에게 왈가닥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 입을 닫았고, 산이는 그녀의 비밀을 자신의 입으로 발설했다는 미안함에 평소와 다르게 침묵을 지켰다. 가끔 밤새우는 소리가 그들의 정적을 깨웠다.
“한창때 한바탕하고 나니 다들 속이 후련하냐?”
여대장이 짧고 길었던 묵언을 깨고선 의기소침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울이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저희가 철이 없었습니다. 전장에서 기도비닉 유지는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본대로 귀대해서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너희가 일당십의 훌륭한 병사인 것은 맞지만, 원래는 아이들이 아니냐? 이건 모두 전쟁을 핑계 삼아 어른들이 너희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다.”
울이의 진심 어린 사과에 당황한 여여문은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죄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하염없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는 산이의 귀를 당겼다.
“만악의 근원은 너야. 너…. 어서 대장님께 사과드리지 못해?”
“아오. 아프다 아파. 또 시작이네. 너 자꾸 이러면 좋은 서방 못 만난다….”
그는 조금 전의 고통을 순식간에 떠올리고는 손으로 남자의 중심부를 가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상이 빗나갔다.
“흑흑. 내 꼴을 봐…. 선머슴 같은데…. 누가 데려가겠니…. 흐엥….”
산이에게 계속 놀림을 받자 그녀의 곱고 큰 눈동자에 작은 옹달샘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처음 보는 울이의 행동에 당황해서는 횡설수설하며 수습에 나섰다.
“울이야…. 울지마라. 응? 진영에 돌아가면 내가 저놈을 혼구녕을 내어주마….”
“그래. 울이야. 내가 정말 나쁜 놈이다. 차라리 하던 대로 차라. 살살. 흑….”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울이는 소매를 눈물을 훔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그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산이 너는 두 번 다 시 계집 소리 어쩌고저쩌고 안 하는 거다? 그리고 대장님도 오늘 일은 기억 속에서 지워주세요. 헤헤.”
그녀가 그들을 놀리려고 한 짓임을 뒤늦게 알아챈 여여문과 산이는 마지못해 그렇겠다고 약조했다. 혹시 또 그녀의 울음보가 터지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자. 밤새우기가 적적한데, 화제를 돌리자꾸나.”
여대장이 먼저 어색한 현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평소에 말을 먼저 건네는 성격이 아닌 울이가 이날 밤만은 입을 열었다.
“고향에서 본 고래이야기 해드릴까요?”
“그래…. 너의 고향이 여기 울산이었지. 고래이야기를 해다오.”
그가 그녀의 출신을 꺼내자 울이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밝게 하고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님이 저 어렸을 때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말씀해주신 고래 중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바로 귀신고래였습니다. 쇠고래라고도 하는데 해안가에 머리를 세우고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귀신고래라고 불린대요. 크기가 8 간(약 15m)이 넘는다고 하셨어요. 게다가 영리하기는 어찌나 영리한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범고래를 귀신고래 세 마리가 각자 꼬리로 쳐서 쫓아내기도 한데요. 그래서 다른 고래보다 사냥하기 훨씬 힘들다고 하셨어요.”
“호오. 그 귀신고래라는 동물은 참으로 지능이 뛰어나구나….”
여여문은 그녀의 귀신고래 이야기에 감탄하며 소감을 털어놓았다. 울이는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그를 보면서 신이 났는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게다가. 재미있는 건 여타 고래들과는 다르게 ‘꿀꿀’거리며 운대요. 꿀꿀.”
“야. 집채만 한 고래가 꿀꿀거리며 운다니 그게 말이 되냐? 너희 아부지가 허풍이 심하시구만….”
잠자코 듣고 있던 산이가 딴죽을 걸고 나오자 울이의 얼굴이 다시 울긋불긋 하게 변했다.
“뭐야? 우리 아버지가 허풍선이라는 거냐? 너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지?”
“아. 됐고. 스승님 이번에는 제가 산만한 칡범을 만난 얘기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쉿.”
산이가 그녀의 말을 끊고선 자신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에 여대장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그를 정숙하게 만들었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한 전사의 얼굴로 돌아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오셨다. 오른쪽에 셋 왼쪽에 둘이다.”
여여문이 가르킨 방향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낸 검은 형체들이 천천히 우물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도산성의 왜군들이었다.
“울이는 제갈노에 장전을 하고 산이 너는 쿠나이를 꺼내어 좌편의 적들을 조준해라. 어서.”
여대장의 추상같은 명령에 소녀는 감춰두었던 쇠뇌를 꺼내 들었고, 소년은 품속에서 끝이 뾰쪽한 단검 비슷한 물건을 꺼냈다.
제갈노와 쿠나이는 명나라와 왜국의 무기다. 제갈노는 일종의 수노궁으로 활틀에 목제 탄창을 만들어 짧은 화살을 여러 개 넣고선 뒤쪽의 손잡이를 당기면 발사되는 무기로 이 쇠뇌의 장점은 목제탄창과 발사구조로 인해 빠른 시간에 연사가 가능하고, 노약자가 쏠 수 있을 만큼 장전에 힘이 들지 않는 무기였다. 그러나 사거리가 극히 짧고 관통력이 약한 단점이 있었다. 명말의 학자 송응성이 지은 과학기술 전문서인 「천공개물」에는 ‘수노궁은 도둑을 막는 도구일 뿐 전쟁에 쓰이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쿠나이는 왜의 닌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암기로 단검 끝에 손잡이 대신 고리가 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 쿠나이는 왜국의 목공용 도구로 암수를 쓰는 닌자들이 검문검색을 피하려고 사용했다.
서로 온 곳이 다른 이 두 무기의 공통점은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 무기라는 점이었다.
여대장 일행은 적이 우물에 가까이 올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양편에 각각 한 명씩 나무통을 들고 나머지 병사들이 창과 화살을 손에 잡고선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왜군들이 물을 퍼 담으며 긴장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여여문은 나직이 울이와 산이에게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각자 전방의 적을 주시하며 그의 다음 명이 떨어지는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우물에 다가온 목마른 사슴들이 물통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떤 병졸들은 경계심이 풀렸는지 갓 올린 신선한 식수를 바가지 채로 들이 붇기도 하였다.
“지금이다. 왼쪽의 한 명만 살려둔다.”
“슝슝슝”
“휙휙”
“푹.”
그녀의 제갈노와 그의 쿠나이가 동시에 왜군들에게 날아갔다. 울이는 목과 얼굴 그리고 다리에 각각 한발씩을 정확히 명중시켜 오른편의 적을 섬멸하였고, 산이의 쿠나이는 왜적의 이마 한가운데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의 병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타국의 원귀가 되었다.
“으으으…. 다스케테 구다사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목격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겁에 질려있었다. 여대장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머지 둘은 사주경계를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으잌. 이게 무슨 냄새야.”
생존한 왜군 병사 쪽으로 가던 산이가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소리쳤다. 여여문이 자세히 보니 생사의 순간에 다리 힘이 풀려 그만 실례를 한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라. 포로를 심문해야 하니….”
여대장이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곤 병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걱정 마라. 넌 죽이지 않는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나리.”
이름 모를 병사는 그가 왜말을 능숙하게 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었다.
“쉿! 큰 목소리는 내지 마라. 다시 한 번 말한다.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해준다면 너의 목숨만은 반드시 살려주마.”
병졸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없이 동의했다.
“왜성의 사정은 어떠하냐?”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가토 기요마사 장군과 각 장군의 직속군사들을 빼놓곤 다들 배고픔과 목마름에 허덕이고 있습죠. 화공으로 불타버린 창고에 있던 시커먼 게 탄 쌀을 주위 먹습니다요.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게도 가랑비가 부슬부슬 와서 옷과 종이 쪼가리에 얼마 안 되는 빗물을 적셔 꼭꼭 짜 먹고 있습니다요. 게다가….”
“게다가?”
“이틀 전에 본성에 물장수가 왔는데. 그 값이 어마어마하여 있는 놈들만 목을 축이니 사기가 바닥을 친지 오랩니다. 그래서 다들 야밤에 우물가 가는 것을 자원하지요. 이렇게 죽어버렸지만…. 흑흑….”
군졸은 방금까지 함께 했던 동료를 생각하자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여여문은 그런 그를 토닥이며 일으켜 세웠다.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 된 얘기를 해주었으니, 너에게 선택권을 주마. 우리를 따라 항복하겠느냐? 아니면 성으로 돌아 갈 테냐?”
“그래도…. 동향의 친구들이 식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소. 나 혼자 살 수는 없소. 풀어준다면 돌아가겠소.”
병졸은 방금 엄습해온 공포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여대장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물을 떠서 성으로 가거라. 이곳은 우리의 구역이니 너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다만. 이제 이 우물로는 나오지 마라. 그리고 더 버틸 수 없다면 너와 동료들을 이끌고 조․명연합군에게 투항하라. 나도 조선 조정에 몸을 의탁한 왜인으로 지금의 조선왕은 항왜들을 귀하게 여기니 투탁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알겠소. 내 깊이 생각해보리다.”
왜군 병사는 여여문 일행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자신 대신 죽어간 동료 병사들의 넋을 빌고는 자리를 떠났다.
“스승님. 효과가 있을까요?”
산이가 멀어져 가는 검은 형체를 보며 스승에게 물었다.
“공포는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는 치명적인 무기다. 저자가 오늘 겪은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부풀어질 것이다. 왜인들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나 진주 목사 김시민을 이길 수 없는 흉포한 괴물로 받아들이듯이 말이다.”
여여문은 제자에게 대꾸하고선 산 아래로 길을 잡았다.
“스승님. 아니 대장님. 오늘도 적의 수급은 가져가지 않으십니까?”
여여문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하산할 따름이었다. 울이가 살포시 산이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언 손을 자신의 얼굴에다가 가져대고선 입술로 따뜻한 김을 불어주었다. 달빛 사이로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들이 하산하여 조․명연합군 진지로 들어선 때는 새벽녘이었다. 여여문 일행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별장 김응서와 그의 수하들이 수십 명의 왜군을 포로로 잡아왔다. 투항한 그들의 눈에선 더는 굶주림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보였다.
아침에 야밤에 있었던 작전의 성공을 보고받은 경리 양호는 크게 기뻐하여 별장 김응서에게 붉은 비단 1필과 백금 1량을 상으로 내렸다.
만사형통의 기세에 연합군의 누구도 내일을 걱정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위기를 모를 때 찾아오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