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봉선화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이종섶, 버드나무 장례식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던
동네 어귀 버드나무 한 그루
길을 넓히기 위해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어 애를 태웠으나
밑동이 잘려 우지끈 넘어진 나무를
운구하기 알맞게 자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 둘 나타나는 유족들
가족들의 뿌리였던 할머니 위로
든든한 기둥이었던 남편이 먼저 내려왔고
그 위에 있던 자식들도 차례로 도착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이
허공으로 뻗어가는 어린 가지들 뒷바라지가 힘겨워
노모를 돌볼 생각조차 못했던 아들과 딸들이
기계톱의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면 트럭을 타고 떠나갈 가족들
유품으로 남긴 나이테 편지를 읽었을까
언제나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살았던 할머니
떠나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땅속을 헤집는 뿌리 끝까지 그리움이 사무쳤는데
자를 건 자르고 뽑을 건 뽑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수습한 후
마침내 지상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움푹 파인 집에 남겨진 뿌리들은
간혹 할머니의 기억을 틔우기도 하겠지만
빈집을 헤매다 숨을 거둘 것이다
강인한, 빈 손의 기억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이인원, 여우비
벌건 대낮
꼭지까지 취해버린 칸나 꽃대가
돌아서서 울컥
속엣것을 토해내는 순간
차가운 도마뱀 꼬리가
휘익
발등을 스쳐 지나
갔다
문인수, 안개
기차의 긴 꼬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았다
마음의 자욱한 준령, 이 그리움 통과하지 못하겠다
쿵쾅거리는 몸만 제자리 뜨겁게 만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