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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오세영, 팽이
문밖
매섭게 겨울바람 쏠리는 소리
휘이익
내리치는 채찍에
온 산이 운다
누가 지구를
팽이 치는 것일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드디어 겨울
회전이 느슨해질 때마다 사정없이
오싹
서릿발 갈기는 그 회초리
강추위로 부는 바람
하늘은 항상
미끄러운 빙판 길이다
김해자, 니가 좋으면
시방도 가끔 찾아와 나를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말
덜 자란 토끼풀 붉게 물들이던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그게 다인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말이 있다
이상국, 비를 기다리며
비가 왔으면 좋겠다
우장도 없이 한 십리
비 오는 들판을 걸었으면 좋겠다
물이 없다
마음에도 없고
몸에도 물이 없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멀리 돌아서 오는 빗속에는
나무와 짐승들의 피가 묻어 있다
떠도는 것들의 집이 있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문을 열어놓고
무연하게
지시랑물 소리를 듣거나
젖는 새들을 바라보며
서로 측은했으면 좋겠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아주 멀리서 오는 비는
어느 새벽에라도 당도해서
어두운 지붕을 적시며
마른 잠 속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김윤현, 물봉선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모르면서도
먼 곳에서 부쳐오는 편지 같은 얼굴을
서로에게 내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네
돌이켜보면 우리는 말이 너무 없었다네
가파른 산골짜기 후미진 곳에서 이제
향수를 몸에 뿌리고서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삶을 다시 피워내고 어둠이 있었네
봄이 오고 여름 지나 가을이 다 가도록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언어를 다시 찾아
시들어 버린 지난날의 삶을 다시 호명하네
분홍, 분홍 등불을 켜는 얼굴이
문처럼 마음을 활짝 여는 이름도 부르고
돌아선 사람들의 무심한 마음도 불러내네
그 곁으로 바람처럼 가뭇없이 다가가서
오래 묻어 두어 감미로워진 말을 꺼내
내 마음도 문처럼 활짝 열어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