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정, 뿌리 깊은 나무들은 거꾸로 선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노란 은행잎처럼 손바닥을 쫙쫙 펴고
가을 지나 겨울나라로 모두모두 가고 있다
함께 간다는 기쁨이 너무 커
삶은 얼마나 뜨거워야 얼음이 되는지
봄은 또 아지랑이로 기다리고 있는지
조심조심 가는 손떨림만으로
이 흙 이 땅을 움켜쥐고 디디고 두드리다 못해
우리가 기꺼이 물구나무를 서야만 했던, 직립의 이유일 것이다
문숙, 액자를 떼어내며
내려놓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들어낸 자리에 그림자가 남았다
내 가슴팍에 걸려 있던 시간만큼 선명하다
두고두고 환할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자꾸 바라보는 동안 나는 검게 얼룩지고
너는 이발소 그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바라보는 법을 알지 못해 못자국이 깊다
네가 없는 빈자리로 자꾸 마음이 무너진다
나를 없애기 전에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정이랑, 밥값
텅 빈 집에 혼자 밥을 먹는 것만큼
목메는 일 또 있을까, 넘어가지 않는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지만 먹을 수 없다
다들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해 밥을 먹어야 하는가
밥 한 그릇 먹을, 그 무엇을 하였는가
밥값을 못하였으니
먹을 자격도 없지 않은가
밥값도 못하고 사는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살면서 밥값이나 제대로 하면
그게 용한 사람이지
정호승, 우정
내 가슴속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글씨 하나 있다
과수원을 하는 경숙이 집에 놀러갔다가
아기 주먹만한 크기의 배의 가슴에다
머리핀으로 가늘고 조그맣게 쓴 글씨
맑은 햇살에
둥글게 둥글게 배가 커질 때마다
커다랗게 자란 글씨
우정
조은, 언젠가도 여기서
언젠가도 나는 여기 앉아 있었다
이 너럭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가슴속 응어리를
노을을 보며 삭이고 있었다
응어리 속에는 인간의 붉은 혀가
석류알처럼 들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슬픔의 정수리로 순한 꽃대처럼 올라가
숨결을 틔워주던 생각
감미롭던 생각
그 생각이 나를 산 아래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
내가 뿜어냈던 그 향기를 되살리기가
이렇게도 힘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