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달빛 아래 목마른 사슴 上
1597년 12월 27일 밤 도산성 인근 우물가
“쳇. 이게 뭐야….”
왜성 주위의 우물에서 약간 떨어진 숲 속. 숨어있는 작은 키의 사내아이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어른 남자 한 명과 같은 또래의 키 큰 아이가 함께 엎드려 있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진짜 달구경이나 하지고 한 건데….”
두꺼운 솜옷을 입고 있던 큰 키의 아이가 그를 달래며 말을 꺼냈다.
“쉿. 조용히 해라. 임무수행 중에 잡담들이냐? 그리고 산이 이놈아. 그만 좀 징징 돼라.”
함께 있던 중년의 사내가 아이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그러자 작은 아이는 작정한 듯 사내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여대장님이 막사에 있던 저를 나오게 하려고 울이한테 시킨 거 아닙니까? 근신 중인 사람을 이렇게 막 부려 먹어도 되는 겁니까?”
“딱”
중년의 남자는 더는 말로 하지 않고 반항하는 산이의 이마에 딱밤을 새겨 주었다. 이를 지켜보던 울이가 키득키득 거리며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너도 참 매를 번다. 벌어. 킥킥”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겨울비 내린 날밤에 매복이라니 최악이다. 최악….”
“딱”
이번에도 짧고 굵은 소리가 산이의 이마에서 났다. 여여문은 되레 큰소리를 내려는 제자의 입을 막으며 전방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
이틀 전 저녁 도산성 삼지환 입구
“얼토당토않은 협박은 관두고 이만 황천길로 가거라!”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인 가토 키요베에의 칼날이 여여문에게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한치의 미동도 없이 내려오는 검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는 우물의 위치를 알려주겠소!”
키요베에의 칼날이 여여문의 머리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멈추었다.
“뭐라고 했는가? 다시 말해보라.”
가토의 부장은 왜검을 상단 양손 머리치기 자세로 고정한 채 그에게 물었다. 여대장은 살짝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오늘 오전에 조선군이 공성한 목적을 이제는 깨달을 거요. 공성은 시간끌기용이고 주공은 이 주위의 우물을 막아 당신들을 말려 죽이는 것! 하지만 내 말을 듣는다면, 이 성의 모두는 살릴 수 없더라도 당신의 주군과 그의 군대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요.”
“아직 깨끗한 물이 있는 우물이 남아 있단 말이냐?”
키요베에는 반쯤 칼을 비켜 내리고선 여여문에게 재차 질문했다.
“내 목숨이 달린 일이요. 눈앞에 검이 왔다 갔다 하는데 거짓을 고하겠소이까?”
“흥. 이런 중요한 기밀을 우리에게 알려서 내가 얻는 게 뭐냐? 아니 파락호 도박꾼 장사치가 명군의 특급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수상하군. 너. 정체가 대체 뭐냐?”
왜장은 의심을 풀지 않고 미심쩍은 부분을 계속해서 캐물었다. 여대장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뭐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난 뼛속까지 상인이요. 당신들과 지속적인 거래를 바라고 있소. 식수를 끊는 지구전을 펼치는 것은 공동 총대장인 경리 양호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거요. 그러니 명군 내에서 어찌 불만이 없을 수 있겠소. 마군을 통솔하는 어느 장수가 자신의 사람을 시켜 몇몇 우물에 독을 탄 것과 같이 위장했소. 그대들은 내가 일러준 곳에 와 식수를 퍼가면서 식량과 필요한 생필품을 우리에게서 사가면 되오. 물론 가격은 이쪽에서 정하는 걸로…. 어떻소?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가 아니오?”
그의 말에 잠시 잠깐 고민하던 키요베에는 다시 칼을 여여문에게 겨누며 말을 이었다.
“흥. 얕은수다. 이렇게 우물가로 유인한 다음 우리 군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아직은 너를 신뢰할 수 없다.”
“오늘 밤. 내가 말하는 곳에 전투에 쓸모없는 자들을 몇 명 보내보시오. 어차피 수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 식량만 축네고 있으니 이들이 죽거나 다친다 해도 그쪽에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요.”
여대장의 막힘없는 대답에 키요베에의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좋다. 너와 저 되놈들을 살려 보내주마. 이는 너의 윗선인 명군 고위층에게 보내는 신뢰의 표시이다. 그리고 밤이 깊으면 네가 말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겠다.”
“고맙소이다. 그럼 이따가 뵙겠소.”
여대장은 가토의 부장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키요베에는 성문 지기에게 손짓하여 성문을 열게 하였다.
---
‘그래도. 작전을 펼치기에는 너무 이른 때야. 아직 적들은 우리를 전부 신뢰하지 않을 텐데…. 물론 경리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야. 가토의 애를 닳게 해서 왜군과의 항복협상에 있어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오르고 싶겠지….’
여대장은 밤이슬을 맞으며 어제의 일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대로 깨끗한 물을 찾아오는 적을 포획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양 경리는 조·명연합군의 날랜 병사들을 차출하여 오늘 밤에 덮치도록 명했다.
“대장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울이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여여문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울이에게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조총이 들려 있지 않았다. 도산성의 왜적들을 소음으로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번 작전에는 무성 무기만이 휴대가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다. 잠시 지난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읍읍”
그에게 입막음을 당한 산이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가 생각에 빠지면서 자신의 애제자의 처우 또한 잊어버린 것이다. 여대장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살짝 짓고는 산이를 해방해주었다.
“헥헥.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방금 스승님은 아동포살수대의 유능한 지휘관 하나를 죽일 뻔 하셨다고요.”
제자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스승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 그의 등짝에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강타했다.
“짝”
“아오. 아파라. 또 이러신다. 또!”
“어떤 명민한 초관 나리가 전장에서 근신처분을 받느냐? 네놈 때문에 엊그제부터 내가 고생한 걸 떠올려보면 난장이라도 쳐야 속이 후련하겠다. 이놈아!”
“그러니까…. 윽….”
다시 어깃장을 놓으려 한 산이를 이번에는 옆에 있던 울이가 가는 팔로 목을 살짝 졸랐다.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여여문에게 사과했다.
“저의 직속상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장님.”
“흠…. 참으로 훌륭한 부대원의 인성을 고려하여 사죄를 가납하마. 허허.”
두 사람은 미리 합을 맞추어 놓은 것처럼 화기애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단지 울이의 품속에서 버둥거리던 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산이 또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근데…. 울이야…. 몰캉거리는 느낌이 너무 좋다야. 헤헤”
“퍽”
산이의 생각지도 못한 지적이 들어오자, 울이는 발로 그의 중심부를 타격하며 밀어버렸다. 이미 울이의 얼굴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으악. 또 거길…. 나 장가 못 가면 책임질 거냐? 계집애가 어디서 못된 건만 배워와서는….”
그는 데굴데굴 구르며 그만 그들 사이의 금기어를 발설해 버렸다.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양팔의 소맷자락을 걷기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이번에는 아예 소수(궁에 갓 들어온 어린 수습 내시)로 호의호식하며 살게 해주마!”
“날 보고 성불구자가 된다고? 고자가 됐다, 그런 말인가? 고자라니, 아니,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잌 고자라니!! 내가, 내가 고자라니…. 스승님 제발 울이 좀 말려 주세요.”
산이가 다급하게 여여문을 불렀다. 여대장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철 좀 들어라. 이놈들아. 어휴….”
세 사람이 옥신각신 거리는 모습을 창공의 달님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