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것은 쌀집 아저씨인데 하는짓은 인간 백정>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12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남송 정벌에 매진하던 쿠빌라이 칸은 남송과 교역하는 주요한 국가는 일본이며 이 일본을 달래어 끌어들이면 남송을 고립시킬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일본에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집 내놓으라고 하면 아 그렇습니까?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수차례 사신이 오고 감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쿠빌라이칸은 1268년 전쟁을 준비합니다,
어디에요? 네 고려입니다, 진짜로요, 자기들 일인데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2년후에는 둔전경략사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고혈을 죽죽 뽑아내기 시작하시더니 1271년에 마지막 사신을 끝으로 남송 보다 일본의 싸닥션을 먼저 올릴것을 결정하십니다.
<멀티플레이창에 show me the money operation cwal 소리 좀 안나게 해라!!>
그리고는 즉각적인 병선과 병력 동원을 명령합니다, 어디에요? 네 고려에요, 하다못해 스타를 돌려도 마린이랑 드랍쉽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멀티플레이에 치트키라도 쓰시기를 원했나봅니다.
1272년에는 삼별초라는 고려의 마지막 저항 세력을 전멸시킨 이후 이 원정에 참여한 장수를 모아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274년 몽골은 고려땅에서 4개월 만에 병선 9백척을 뽑아내게 만드는 기염을 토하심에 이르릅니다.
이 결과는 최근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 아니 메이드 인 재팬보다 못한 수준으로 답변되었지만 이 시기야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었지요,
아무튼 그리고 이 해 몽골군 2만 5천 고려군 1만 4천여명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 원정에 나섭니다.
<뭔가 다른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전격의 여몽연합군(...)>
그리고 10월 초 상륙한지 2 시간 만에 쓰시마에서 막부측 병력을 괴멸시키고 이키섬으로 향합니다, 도착한 날짜는 10월 14일 그리고 3일뒤인 10월 17일에는 다카시마에 상륙하더니 그 이틀뒤인 10월 19일에는 요충지인 하카타 만에 상륙하기에 이르릅니다.
정말 태평양 전쟁 뺨치는 진격속도이지요, 이 이면에는 단순히 병력이나 무기의 질적차를 떠나 전술적인 측면도 매우 크게 작용 했습니다.
보통 일본의 전쟁은 시작할때 사무라이가 나서서 명적 즉 소리나는 화살을 쏘아 시선을 모으고
"나는 누구누구의 아들 아무개이며 어느 어느 전장에서 명성을 떨쳤다, 용기있는 자가 있다면 나와 싸우자!!!!" 라고 하는데
몽골에서는 명적을 쏘는 것은 전장의 시작을 알리는 등 명령을 내리는 용도입니다.
<역시 사무라이는 백병전!! 일기토!!>
즉 명적이 울리자 일본은 사무라이가 앞에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몽골은 병력을 몰고 들어가 적을 갈아버리고 있었다는 거죠,
이 하카타만은 큐슈의 도성인 다자이후와 지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막부측이 쓰시마와 이키의 급보를 전해듣기도 전에 여몽 연합군은 상륙 지점을 확보했고 10월 20일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등 3개 지점에서 상륙 작전을 개시합니다.
이 시점에 겨우 급보를 전해들은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큐슈 지역에 총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보를 전합니다,
(여담이지만 이 급보는 전쟁이 끝난지 일주일 뒤에야 도착하게 됩니다.)
일본의 사료 본토방위전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월 19일, 이마즈 해안에 상륙한 일부 몽골 부대는 감시대를 밀어내고 성을 빼앗았다. 그중 일부는 다음날 모모치바라 해변에 상륙할 주력군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동진해, 모모치바라의 남방 소하라 산을 점거했다. 소하라 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하라다 일족과 마쓰라도는 몽골군의 집단 전법과 신병기의 위력 앞에 무참이 유린당하고 패퇴했다.'
<더러워도 위에서 까라면 까야하는 군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김방경 장군>
이 시점에서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사와라가와 어귀인 모모치바라에 상륙하여 사와라를 거쳐 내륙으로 육박하면서 적을 믹서기의 토마토 처럼 갈아버리고 있었는데 하카타 지구 전선 사령관인 가게스케는 고려군 상륙작전 급보를 듣고 아카자카 지구를 맡고 있던 기쿠치에게 다급히 응전할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하루 전 소하라 산을 급습해 점거하고 있던 몽골군이 기쿠치 군 배후에서 고려군과 양동작전을 펼쳐버렸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모모치 벌판을 점령하고 북진해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지역을 장악해 사실상 후쿠오카를 점령하기에 이르릅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몽골군 주력부대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에 상륙해 일본군을 패퇴시킴으로서 일본군의 하카타 만 해안방위선이 30킬로미터가 모두 붕괴에 이르게 되는데 쇼니 쓰네스케는 옥쇄를 각오하고 최후의 방어선인 미즈성에 잔여 병력을 모아 방어전을 펼치기로 합니다만 여몽연합군이 배로 돌아갑니다..
사유를 본다면 병력의 보충과 보급 문제나 전열을 정비한 적이 급습할 것을 우려한 것이 표면적인 사유였지만 실제는 지휘부의 내분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고려측은 할만하다, 그냥 밀어버리자 였지만 몽골측은 내가 고려 출신 애들을 어떻게 믿느냐 였고 심지어는 일전의 전투에서 카케스케에서 활을 맞은 정동좌부원수 유복형은 전의를 상실한 지경이었습니다.
<고려의 함선인 누전선과 평전선 누각이 있으면 누전선이고 없으면 절벽가슴 평전선입니다.>
그리고 그날 새벽 큰 대폭풍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9백여척의 배중 2백여척이 가라앉아 버립니다.
따라서 사실상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 한 형편이라 철수를 결의합니다.
2차 원정은 7년후에 있었습니다, 1차 원정이 실패하자 몽골은 다시 사신을 보냈는데 일본측이 접견도 안해주고 전원 참살시킨것은 물론이거니와 어차피 2차 원정이 있을 것이면 적극적으로 하는게 왜구도 갈아버릴수 있고 더러운 몽골놈들 특히 매국노 홍다구가 와서 진상 부리는거 안봐도 좋으니 좋은것이라는 고려측의 포지티브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이인 1276년 3월 일본에서는 이국 출격이라 명하는 고려정벌이 계획되었습니다만 정보 부족 및 가능성 없음을 사유로 계획은 폐기되었고 대신 하카타 만에 동북 아시아판 마지노선을 건설할것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4년뒤 여몽연합군 2차 원정군이 출발하는데 지휘부는 같았지만 1차 원정시 전우였던 흔도와 홍다구,김방경은 이즈음 서로 적대적인 사이였으며 고려 출신의 매국노이던 홍다구는 김방경을 무고해 고문을 일삼는등 잔혹한 짓을 일삼았기에 개판 오분전이었습니다.
더욱이 강남군이라고 추가로 붙여준 병력은 남송의 제독이던 범문호가 사령관으로 붙어있고 숫자만 10만이지 1급은 쿠빌라이의 친위대나 중앙아시아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2급은 광동,광서지역의 산악 토벌전에 투입된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폐급이었던 데다 들고 온것도 농기구와 씨앗 위주이라서 전력으로 처주기도 애매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일본에 어서오세요>
이렇게 불안 불안하게 시작된 2차 여몽 원정군은 1281년 5월 3일일 출발하여 거제도에서 잠시 머물다 21일 동네북...아니 쓰시마에 상륙하여 수비대를 또 갈아버리고 섬을 점령합니다.
5일 뒤인 26일 이키섬에 상륙한 여몽 원정군은 1차 정벌때 다자이후의 총사령관이었던 쇼니 쓰네스케의 아들 쇼니 쓰케도키와 사실상 유일한 전면전을 치르고는 10일 뒤인 6월 6일에 하카타 만으로 진격합니다.
<방루 너머를 살펴보는 여몽 연합군 .jpg>
여기서 그 들이 본것은 마리아 월..아니 20km에 달하는 해안가를 완전히 막아버린 높다란 방루와 그 뒤에 새카맣게 몰려들어 있는 일본군이었습니다.
역시 마지노선은 피해야 제맛...일리는 없고 여몽 연합군은 당장 피를 흘릴 까닭이 없기에 우회하여 시카노 섬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선봉을 맡은 고려군은 수비대를 시원하게 갈아 잡수셨는데, 이후에 3백척의 함대를 동원해 나가도를 점거 시모노세키 해협을 차단하여 일본의 물자 및 병력을 차단하기에 이르릅니다.
이 시점인 6월 10일을 전후하여 시카노 섬, 노코노 섬등에서 여몽연합군은 막부측과 수 차례 교전을 벌였는데 고려군은 늘 그렇듯 토마토를 믹서기에 갈아버리듯 시원하게 승전보를 울렸지만 몽골군 지휘부의 예상치 못한 무능과 강남군의 만만디 정신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발목을 잡히게 됩니다.
<고려사 -> 써머리 = 고려사절요입니다.>
이 일화를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김방경은 6월8일 일본군과 힘써 싸워 적의 목 300여급을 베었으나 홍다구는 일본군에 돌파되어 목이 떨어질세라 허겁지겁 도망쳤다.왕만호가 이끄는 궁노 부대의 구원으로 홍다구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다음 6월 9일 전투에서도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진중에 전염병이 나돌았기 때문에 죽은 자만 3천에 이르렀다'
이를 좀 더 살펴보자면 이보다 앞선 시점 3백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나가도로 진격하여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한 여몽 연합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쓰노시마 섬과 후다이 섬을 점거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8일과 9일에 걸쳐 나가도 도요우라의 도이히가마와 구로이의 야쓰가하마에 상륙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도이히가마의 경비를 맡던 나가도의 수비군과 가마쿠라 막부의 직속무사 마사우에의 부대는 몽골군에 크게 패해 고센가하라까지 후퇴하였고 이후에 전열을 재정비한 나가도의 잔여병력인은 간토에서 내려온 아다치 모리무네 부대의 증원을 얻어 6월 15일 고센가하라 전투에서 몽골군을 간신히 격퇴하였습니다.
야쓰가하마에선 성주 기요야마가 일족을 이끌고 나가도 슈고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몽골의 상륙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성주는 전사하고 일본측 병력은 야쓰모까지 후퇴하였는데 6월 13일 몽골군은 야쓰모 분지에서 패퇴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지휘관의 무능...아니 예상치 못한 반격 탓에 몽골군에게 안좋게 흐르자 흔도와 홍다구는 회군을 논의했으나 김방경의 반대로 다카시마 앞바다로 일단 후퇴해보기로 합니다.
<그토록 찾아헤멘 이키섬 안드로메다>
그리고 강남군이 마침내 보름만에 도착했습니다, 이키섬이 아니라 머나먼 안드로메다 히라도 섬에 말이지요,
이렇게 숫자가 제법 모인 여몽연합군은 부상자와 전염병등 낙오자가 많은 병력을 재편성, 하카타 만 공격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전열을 가다듬은 여몽연합군이 다카시마 근해에 집결한것은 7월 27일이었고 이 날 하루만에 다카시마를 손에 넣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함대를 끌어모아 다카시마를 노리지만 근 4천여척의 함대를 보고 전면전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다음 날 해상 이동을 준비하기 위해 선상에서 숙면을 취하던 여몽 연합군의 머리위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함대 전멸 ☆(.....)
간신히 다카시마로 피난해온 다수의 몽골군은 추격해온 일본측 병력에게 초토화가 되는데 말이 좋아 초토화이지 저항에 따라 큰 피해를 입습니다. 이러한 잔당 토벌전은 6일 이후까지 계속 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