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전개때문에 부득이하게 갈증편을 마무리 하고 제15장으로 넘어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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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항복과 강화
1597년 12월 27일 낮 학성산 조·명연합군 수뇌부 진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보름치(음력 보름께에 비나 눈이 오는 날씨)로 인해 도산성 주변은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날도 인간들의 반목과 전투는 계속됐다. 접반사가 짜 올린 계책에 마음이 동한 경리 양호는 대규모 공성을 지양하고 지구전으로 전군의 작전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조·명연합군에게 투항한 왜군 병사에게 상급으로 은자를 내려주고는 붉은색 비단옷을 입혔다. 그리고 멋진 검은색 명마에 그를 태워 성 주위를 돌게 하였다. 투항을 권고하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또한, 양 경리는 조선군에게 재빠른 준마와 포를 실은 수레를 연결하게 하여 왜성의 둘레를 천천히 돌면서 방포하게 하였다. 왜군 입장에서 조선군의 이동식 포대는 눈엣가시처럼 성가신 존재였다.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연신 조총을 쏘아댔다. 이로 인해 화약소모가 급격히 늘어나고 병사들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한낮이 되자 도산성에 백기를 든 왜장 하나가 양호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 그대는 어느 군의 누구인가?”
비단으로 호화스럽게 장식된 상석에 앉은 양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부복해 있는 왜장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주위에는 제독 마귀를 비롯한 명의 장수들과 도원수 권율, 접반사 이덕형 등의 조선군 수뇌부가 배석해 있었다.
“예. 저는 가토 기요마사님의 부장인 미노베 키하치로라고 하옵니다. 양 경리 각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미노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절도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양호는 길게 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겨울은 낮이 짧으니 서론은 이쯤하고 본론을 말하라.”
“예. 도산성의 여러 장수들이 숙의한 바 경리께 강화협상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이번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태연히 이곳에 온 목적을 밝히는 왜장이었다.
“뭐라? 협상? 칼자루는 진즉부터 우리가 쥐고 있는데 무슨 협상 말인가!”
양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제독 마귀가 미노베의 말을 듣고선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를 양 경리는 손짓으로 진정시키고 말을 이었다.
“흥. 좋다. 내용이나 들어보자꾸나. 실없는 소리를 하려 부장이나 되는 자가 목숨을 걸고 성을 빠져나오진 않았을 것이니.”
“감사하옵니다. 각하. 이 문서를 보아 주시옵소서.”
미노베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양호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존경해마지않는 대 명국 흠차경리조선군무이신 경리 양호 각하께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이 도산성의 주인인 가토 기요마사는 아직 서생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에 소장들은 경리께옵서 조선의 장관 1인을 차출하여 저희와 함께 서생포의 가토 장군에게 가서 우호의 맹약을 하게 된다면 대 명과 대 일본국의 군사들이 많이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경리각하의 넓으신 아량을 삼가 바라옵니다.
타이코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도산성의 제장들을 대표하여 오타 가즈요시 올림」
“너희가 우리 천군과 천장들을 우습게 보는구나!”
양호는 오타의 글을 읽자마자 족자를 찌그려 트려 아래로 던지고는 일갈했다. 접반사 이덕형이 떨어진 서신을 읽고는 미노베에게 강경한 어조로 힐난했다.
“이미 저 성에 잡혔다가 탈출한 포로와 탈영한 너희 병사들이 하나같이 가토의 입성을 증언하고 있다. 어디서 잔꾀를 부리는가?”
“그깟 놈들이 무얼 아신다고 화를 내는 거요? 저놈들이 본 것은 가토 장군의 가게무샤일 뿐이외다.”
왜장은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이 접반사의 말을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허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양호의 코웃음이었다.
“흥. 성안에서 가토 키요베에를 직접보고 온 자도 있다. 가토의 최측근인 그가 주인을 놔두고 혼자 움직이는게…. 이상하지 않는가?”
“그…. 그건….”
미노베는 양호의 갑작스러운 질문공세에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엔 도원수 권유이 그를 보며 정곡을 찔렀다.
“본장이 너희의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서생포의 가토를 존재를 부각하여 연합군의 눈을 저 왜성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얄팍한 수가 아닌가!”
“...”
왜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양호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으며 입을 때었다.
“내가 가토 장군에게 서찰을 하나 써 줄 터이니 너는 지금 아군의 통사와 함께 돌아가 답을 알려다오. 아. 그리고 장군에게 내 죽엽청 한 동이 보내니 같이 가지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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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적군도 바보는 아니군.”
한 식경 후. 도산성 이지환 가토 기요마사의 거처에는 주장 가토와 군감 오타 가즈요시 그리고 약관의 장수인 아사노 요시나가 다다미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과 세자 정도 떨어진 곳에 가토의 부장인 미노베 키하치로가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고 있었다. 문앞에 선 가토 키오베에가 그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양호가 나에게 서신을 보냈다면서?”
가토는 담담한 말투로 미노베에게 물었다.
“예. 여기 있사옵니다. 주군.”
그는 붉은 비단을 감싼 호화스러운 족자를 품속에서 꺼내 바쳤다. 가토는 족자를 받아 들고선 헛기침을 했다.
“험험. 누가 가서 게이넨 스님을 불러와라. 요즘엔 눈이 침침하니 악필은 읽기가 힘들구나.”
“예. 장군”
키요베가 눈치껏 대답하고선 장지문을 열어 수하들에게 명했다. 잠시 후. 늙은 승려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안의 장수들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소승을 찾아계시옵니까? 장군.”
“그렇소. 적의 수괴 양모가 괴발개발 휘갈긴 낙서가 나에게 왔는데, 그 필체가 워낙에 조악한지라 내 스님을 이리 모시게 되었소.”
가토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족자를 게이넨에게 건넸다. 승려는 두 손으로 공손히 서신을 받아 들고는 낭랑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권고장.
왜국 총대장 가토 기요마사는 들어라.
너의 수하가 잔꾀를 부려 천장을 농간하려 하려는 것은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중원의 주인이신 황상 폐하의 넓은 덕과 아량으로 이번 한 번 만은 넘어가 줄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만 말하자면 너와 너의 군사들이 천군에게 항복해 온다면 그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에 일러 관직을 제수하고 후한 상급을 내리게 하겠다.
나. 조·명연합군 총사령관인 양호가 말한다. 이 약조는 결단코 저버리지 않겠다.
너의 현명한 결정을 기다리고 있겠다. 마침 성안에 물이 없다고 하니, 약소한 술 한 병을 딸려 보낸다. 이 술로 심신의 갈증을 풀도록 하라.
대 명국 흠차경리조선군무겸 도찰원우첨도어사 양호」
“중원의 돼지 새끼 하나가 우리 군을 농락하다니….”
젊은 아나노 요시나가가 먼저 양호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다다미를 치며 고함을 질렀다.
“가토공. 이러지 말고 성의 전 병력을 이끌고 저놈들과 단판 승부를 봅시다. 동귀어진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요.”
“아니 될 말이요. 아사노공. 이미 병력의 2할을 잃었소. 게다가 저들의 공성을 방해하는 유일무이한 무기인 조총에 들어가는 화약이 4할이 소비되었소. 그뿐만이 아니오. 중요한 식량의 반이 불타버리고 식수는 바닥났소이다.”
오타 가즈요시는 젊은 혈기만을 믿고 설쳐대는 아사노에게 본성의 사정을 조목조목 알려주며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때. 여태껏 입을 닫고 있던 가토가 말했다.
“중요한 건 사기요. 기아에 시달리고 다쳐서 기력을 잃은 자들을 데리고선 이성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오.”
그는 좌중을 한번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본인이 도산성에 들어온 지 나흘이 흘렀소이다. 나흘. 각지로 흩어진 전령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소이다. 적어도 울산성과 근접한 부산포에서라도 기별이 와야 함에도….”
“그럼. 저 오만무도한 양호놈에게 항복하실 겁니까?”
아사노는 핏대를 세우며 가토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에게 가토는 웃으며 말했다.
“아사노공. 작은 배가 격랑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시오?”
“이 상황에서 무슨 선문답이십니까?”
젊은 무장은 주장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했다. 가토가 말을 이었다.
“파도에 맞서지 않는 것이오. 적은 지연전을 펼쳐 우리 군이 두 손 들고 항복하기를 바라고 있소. 허나, 역지사지해보면 기다리는 입장인 저들도 처지도 마냥 좋지는 않소. 생각해 보시오. 물과 기름 같은 명군과 조선군의 조합이 얼마나 갈 것이라 보시오?”
“장군. 과연 적들이 서로 돌아선 때를 맞춰 구원군이 오겠습니까?”
이번에는 오타가 가토에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순망치한이라고 했소이다. 별안간 시작된 적의 공세에 아군이 잠시 움츠러든 것뿐일 것이오.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외다. 이 가토가 지키는 도산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성들도 모두 각개격파 당할 거라는 것을….”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가토 님.”
지금껏 장수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게이넨이 입을 열었다. 가토와 제장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는 적장의 환심을 사서 그의 마음을 흩트려 놓으면 될 것입니다. 제게 생각이 있으니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가토는 고개를 끄덕여서 가부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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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가토라는 작자가 참으로 맹랑하고 당돌하지 않은가?”
가토가 쓴 답서를 본 양호가 크게 웃으며 서신을 휘하 장수들에게 보였다. 이를 본 수하들도 양 경리와 같은 반응이었다.
“장불승기분, 이의부지, 살사삼분지일, 이성불발자, 차공지재야. 고선용병자, 굴인지병이비전야. 발인지성이비공야. 훼인지국이비구야, 필이전쟁어천하, 고병부둔이리가전, 차모공지법야.라...”
함께 가토의 글을 본 도원수 권율이 글의 내용을 되새기고 있었다. 양호는 문사로 이름 높던 접반사 이덕형에게 풀이를 맡겼다.
“여기 모이신 장수들은 모두 알다시피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오는 글귀올시다. 「장군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졸들을 개미처럼 부려 성을 공격한다면, 아군 3분의 1이 죽는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성을 뺏지 못한다면, 이것은 무모하게 공격 한데서 오는 재앙이다. 고로 전략에 능한 자는 적을 굴복시키되 싸우지 않고, 적의 성을 함락시키되 공격하지 않고, 적을 무너뜨리되 장기전을 쓰지 않는다. 반드시 온전함으로써 천하를 다투거니와, 전력이 무디어지지 않고서 이익을 온전히 할 수 있다. 이것이 계략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라는 뜻이오."
“허허. 무식한 칼잡이였는 줄 알았는데, 제법 풍월을 아는 자라 마음에 드는군. 하오. 하오.”
양호가 파안대소하며 가토의 답서에 대한 감상을 밝히자, 제독 마귀가 양 경리에게 따져 물었다.
“경리. 저 원숭이놈이 우리 군을 조롱하는 글을 올렸는데 어찌 환호작약하시는 겁니까?”
“이보시오. 마 제독. 가토가 에둘러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소이까? 오랑캐들이랑
말 타고 사냥하는 것 말고 차분히 무경칠서를 다시 통독해 보시구려.”
양호에게 보기 좋게 당한 마귀가 꿀 먹은 벙어리 만 양 입을 닫았지만, 그의 언짢은 심사는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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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이틀간 양측의 실무진들이 도산성과 학성산을 부지런히 왕복한 결과로 가토 기요마사와 경리 양호 간의 회담이 12월 30일에 성사되었다. 장소는 왜성과 명군 진지의 중간에 임시가옥을 지어 회담장을 대신하기로 했다. 명군은 이를 항복협상이라 불렀고 왜군은 강화회담이라 칭하는 이상한 만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