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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mTEqCxSShn4
이홍섭, 서귀포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유승도, 큰 손
흙도 씻어낸 향기나는 냉이가 한 무더기에 천원이라길래
혼자 먹기엔 많아 오백원 어치만 달라고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꾸역꾸역, 오히려 수줍은 몸짓으로
한무더기를 고스란히 봉지에 담아 주신다
자신의 손보다 작게는 나누어주지 못하는 커다란 손
그런 손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아득히 잊고 살았었다
최선준, 눈뜬장님
이 밤, 가만히
아내의 안경을 끼어봅니다
눈뜬장님이 됩니다
그랬나봅니다. 시(詩)만 바라보는
꿈만 꾸는 눈으로 사는 그런 남편이 놓친
주위를 살피고
현실을 챙겼나봅니다
슬픔은커녕
우울 한 줄 읽지 못하는 돋보기 너머
흔들리는
괜스레 흔들리는 잠든 아내 얼굴을 보면서
투박한 손길로
수치스런 옷섶으로, 아내의 안경
살금살금 문질러봅니다
내 얼룩 닦아봅니다
고정희, 소외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