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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금, 붉은 방
누구나 몸 속에 붉은 방 하나씩은 갖고 있다
좌심방 우심방 그 뒤, 가장 깊이 면도날로 숨겨놓은 방
꿈이 붉어, 붉어서 죽지 않는
열망으로 짓물러 서러운 반점처럼 찍힌 방
꽃술까지 붉은 물감 쏟은 피 같은 방
헛구역질 헉헉대면서도 끌어안고 있던 방
뜨건 하혈 무섭게 쏟아내도 제 방이라 우기던
꽃잎, 그 피의 향기
얼음 껴안은 영하 10도의 체감으로도
불 꺼지지 않는 방
그 붉은 방을 지탱한 독한 심지의 기운이
지옥 불길 속을 지나
불 꺼진 나를 살렸다
임영조, 6월
언제쯤 철이 들까
언제쯤 눈에 찰까
하는 짓이 내내 여리고 순한
열댓 살 적 철부지 아들만 같던
계절은 어느새 저렇게 자라
검푸른 어깨를 으스대는가
제법 무성해진 체모를 일렁거리며
더러는 과격한 몸짓으로
지상을 푸르게 제압하는
6월의 들녘에 서면
나는 그저 반갑고 고마울 따름
가슴 속 기우(杞憂)를 이제 지운다
뜨거운 생성의 피가 들끓어
목소리도 싱그러운 변성기
저 당당한 6월 하늘 아래 서면
나도 문득 퍼렇게 질려
살아서 숨 쉬는 것조차
자꾸만 면구스런 생각이 든다
죄지은 일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빌고 싶은
6월엔
이상국, 틈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는
한겨울에 뿌리를 얼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위에 틈을 낸다고 한다
바위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며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생이다
나는 지난겨울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용산에 언 뿌리를 내리려다가
불에 타 죽는 걸 보았다
바위도 나무에게 틈을 내주는데
사람은 사람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오탁번,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김수정, 미역국을 끓이며
방문 잠그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는 갯바위처럼 웅크려있고
미역귀만큼 오글쪼글 접힌 말들이
문턱 앞에 툭 툭 던져져있다
문지방이 갈라놓은 저편에서, 너는
무슨 꿈을 꾸느냐
시원의 바다를 헤매고 있느냐
너를 낳고 가끔씩, 앨버트로스처럼
날고 싶어 퍼덕일 때 있었다 그때마다
신열로 축축 늘어져 내 발목을 휘감던
너의 열일곱 번째 생일상을 차린다
나를 키워준 바다를 향해
바락바락 대들던 내 열일곱에도
뜨끈한 미역국은 놓여있었다
무겁게 드리운 커튼을 열자
이마로 쏟아지는 햇살
오랫동안 말라있던 기억을 불려
돌미역 같은 아침을 주물러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