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물 사시오. 물을 사. 에헤야 디어...”
이지환과 삼지환을 연결하는 출입구 앞에 나무통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험상궂은 명나라 인들이 통들을 지켜서고 있었다. 그곳에서 쫄딱 망한 상인으로 변장한 여여문이 호객행위를 한창 벌이고 있었다.
‘흠. 이놈들 사정이 말이 아니구나….’
조금 전의 일이었다. 여대장이 물을 가지고 왔다고 밝히자 거드름을 피우던 수문장은 부리나케 성안 쪽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성문이 열렸다. 수비하던 왜군 병사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와 그가 가지고 온 수레를 뺏고선 우마차를 끌고 온 명나라인들에게 손짓했다. 여여문은 수비대장을 큰 소리로 불러댔다.
“나리! 장군 나리!”
“왜 그러느냐?”
왜성 안으로 사라졌던 수문장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여문은 그의 귀를 잠시 빌렸다.
“헤헤. 소인과 저기 명국 놈들의 목숨은 보장해 주시는 거지요?”
수문장이 다시 여대장의 귀를 땅겼다.
“물론이다. 무사는 허언하지 않는다.”
잠시 후. 민요 가락을 흥얼거리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여여문의 뒷모습을 보면서 왜장은 생각했다.
‘곧 교대시간이군.’
여여문이 안심한 듯 우마차 무리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건을 팔 장소로 향하며 본 도산성의 모습은 처참했다. 불에 그슬리고 탄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다친 병사들과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저기…. 물 한잔에 얼마요?”
물장수가 왔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는지 성안의 왜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다만 상관의 눈치가 보였는지 주저하는 이들 중에서 하나가 용기를 내어 가격을 물었다.
“헤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저희는 은화만 받소이다. 물 한잔에 은 반 량이요. 싸지요.”
여여문은 왜군을 접대하며 가격을 제시했다.
“에에. 손나. 히도이요.”
“다카이데스. 젯타이 오카시….”
주위의 왜인들이 금액을 듣고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당시 아시가루 연봉이 1칸 (전국시대 최소화폐단위인 1몬의 1,000배) 500몬이었고, 은화의 가치가 한량에 400몬이었으니, 이날의 물 한 잔 값은 일반병사의 한 달 치 월급을 두 배 나 웃도는 미친 가격이었다.
“이 귀한 청수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썩 꺼지시오.”
여여문은 팔짱을 꼬오며 거드름을 피워댔다. 그를 보호 겸 감시하러 따려 보낸 명국인들은 긴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는 돈 내지 않고 물통주위에 모여드는 왜군 병사들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저…. 한잔…. 주시구려.”
다이묘들에게 갑옷을 빌려 입은 아시가루보다 화려한 복장을 한 병사가 여대장에게 다가왔다. 그는 품속 깊이 숨겨두었던 은량을 꺼내 들고 있었다.
“오. 개시구려. 옜소 거스름돈. 그리고 한잔하시구려.”
여여문은 물통 옆에 있던 나무로 만든 투박한 잔에 한가득 물을 퍼 담아 그에게 건넸다. 은량을 낸 병졸은 물속을 잠깐 쳐다보다가 작심한 듯 쉬지 않고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어. 천천히 마시오. 그러다 체할라. 물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오.”
여대장이 급하게 물을 마시는 그에게 핀잔 같은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여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꿀꺽꿀꺽 물이 목을 넘기는 소리만 크게 내었다. 병사가 잔을 비우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 물맛 좋소. 이 맑은 청수는 마치 마시는 옥과 같구려.”
그는 여대장에게 잔을 돌려주며 고마워했다. 군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물을 사 먹고선 개운해하는 자가 생기자 여여문의 상단 주위에 몰려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상인 여여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장 대인에게 배운 호객행위를 본격적으로 펼칠 때가 온 것이다.
“자. 다들 들어 보시오. 조선에는 두 가지 명수가 있소. 하나는 저 멀리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천지물이고 또 하나는 남녘에 외로운 섬 제주도의 주산인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화산암반수요. 이 물을 말하자면 두 곳의 물에 견주는 경주 약수 계곡 마애입불상의 단물이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호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영험한 성수라오.”
여여문이 근처 약사천에서 떠온 물을 과장하여 허풍을 치자, 병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돈 여기 있소. 나도 한잔 주시오.”
“나도. 나도.”
“비켜라. 내가 먼저 왔다.”
작은 구멍이 뚫린 둑이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한 번에 무너지듯이 타는듯한 갈증을 이기지 못한 병졸들은 너도나도 해갈을 위해 은화를 던졌다.
“자. 자. 물은 아직 많이 있으니, 차례대로 줄을 서시오.”
병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물장사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병사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엄연히 있었기에, 귀한 은화를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저 맛나게 물을 마시는 자들을 쳐다보거나, 그들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면서 그가 소변보기만을 기다렸다가 그 오줌을 마시려는 자들도 있었다. 좀전의 전투가 왜군 모두에게 불지옥이었다면, 지금은 없는 자들에게 물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타이코 전하의 충용스런 군대는 어디에 갔는가!”
사무라이를 나타내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사내가 이지환의 문이 열고 상인들 곁으로 오면서 무질서한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그의 뒤에 누가 봐도 정예군 티가 나는 군졸들이 보무도 당당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다들 물러서라.”
갑주를 걸친 무사가 명령하자, 도떼기시장 시끄러웠던 분위기가 싹 달아났다. 병사들은 여여문의 무리에서 간격을 띄웠다. 하지만 모두 물통에서 눈이 떠나지 않았다. 미련이 남은 것이다.
“거기. 물장수는 이리 오라.”
부하들을 인솔하고 온 무사가 여대장을 손짓하며 불러세웠다. 여여문은 그의 얼굴을 보자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으나, 다시 도박꾼 장사치 여여문으로 돌아가 왜장에게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헤헤. 높으신 나리가 납셨네요. 어서 오십시오.”
“네가 겁도 없이 명나라놈들을 이끌고 본성에 들어온 그 물장수이렷다?”
왜장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흠…. 담도 크고 수완도 있는 자로군. 그런데 낯이 익은데…. 나를 아는가?”
“아이고. 나리. 쇤네가 어찌 이렇게 높으신 분을 알겠습니까? 헤헤.”
여대장은 비굴하게 웃으며 그의 질문을 피해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음. 좋다. 나는 물을 사러 왔다. 얼마인가?”
“한잔에 은 반 량입니다.”
“뭐라?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구먼. 사카이 상인이나 되놈들보다 더한 놈이로다. 내 너를 여기서 베어주라?”
그가 노한 기색으로 허리춤에 찬 왜검에 손을 대자 여여문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살려주십쇼. 장군. 이 가격은 제가 정한 게 아닙니다요. 다 저 명나라 놈들이 농간을 부린 겁니다.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흥. 어디 조선놈 아니랄까 봐. 목숨보전부터 하려고 용을 쓰는구나. 됐다. 너 같은 잡것을 배면 내 보검이 아깝다. 옜다. 받거라.”
왜장은 그를 비웃으며 품속에서 작은 꾸러미를 땅에 던졌다. 여대장이 떨어진 주머니를 열어보자 그 안에는 금화가 십여 개 있었다. 당시 금화 1량의 가치는 4000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자. 그 정도면 물값은 족히 될 것이다. 여기 내 주군의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하라.”
“나리. 감사합니다.”
무사가 값을 치르자, 뒤에 오와 열을 맞추어 정렬해있던 병졸들이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물을 받아 가기 시작했다. 왜장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여대장에게 물었다.
“식수 말고도 가져온 게 있는가?”
“쌀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가격은 물과 같습니다만….”
“좋아. 내려놓고 가거라. 양곡에 대한 대금은 삼지환 성문 앞에서 내마.”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장군.”
여여문이 연신 굽실거리며 무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왜장은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오래간만에 너를 참수하여 마음속의 울분을 좀 풀 수 있겠구나. 나 가토 키요베에가 한 번에 보내주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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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측간이 어디 있나….”
성황리에 매매되고 있는 판매대를 벗어난 여여문은 배탈을 핑계로 삼지환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도산성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곳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삼지환의 어느 누옥을 지날 때였다.
“여보시오….”
누군가가 힘없이 여여문을 부르는 소리였다.
“거기 누구요. 나는 성 밖에서 온 조선 상인이오.”
그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누옥의 나무문이 서서히 열리며 가는 막대에 의지한 깡 마른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핼쑥한 얼굴을 하고 선 말라서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때었다.
“당신이 그 조선상인이요?”
“그렇소만?”
여대장의 대답에 그는 남은 힘을 짜서 막대를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물을…. 물…. 좀 파시구려….”
“은량만 있다면야…. 근데 몰골을 봐선 비 오는 날에도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겠구려. 쯧쯧.”
여여문이 혀를 차며 그를 동정하자 남자는 누추한 거처 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내와 풀기 시작했다. 보따리 안에는 솜으로 꽁꽁 싸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대신 이걸로 값을 치르겠소.”
사내는 보따리 안에서 작고 반짝이는 물건을 꺼내어 여대장에게 건넸다.
“이건….”
“후링이오. 아내가 넣어 준거요.”
여여문의 귀는 사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눈은 작은 풍경에 가 있었다. 귀한 유리로 만든 예쁜 풍경이었다.
“남안(포르투갈 또는 스페인)에서 만든 거라 하오. 바보 같은 마누라가 얼마 없는 장신구를 팔아서 줍디다. 이 유리 후링이 안 깨어질 정도로 조심히 움직이라면서….”
“흠…. 이런 물건은 받을 수 없소. 사내만 득실거리는 싸움터에 팔릴 만한 물건이 아니오.”
“제발. 사정 좀 봐주시오.”
사내는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 도산성까지 오게 된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여여문은 자리를 뜨며 그에게 은화 두 냥을 건넸다.
“좋소. 내 이 풍경을 사겠소. 한 냥으론 두 잔의 물을 사고 나머지론 쌀 두 되를 사서 노인장이랑 나누어 드시오.”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여대장은 그런 그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자. 가지고 온 물건이 동나기 전에 어서 갑시다. 신지. 당신과 겐도우 노인이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진 여러 역경이 있을 것이오. 그러니 마음 굳건히 먹고 귀향하는 그 날까지 버티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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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성에 어느덧 어둠이 찾아왔다. 여여문과 명나라 상인들은 빈 나무통들을 수레에 쌓고선 삼지환 성문으로 향했다.
“잠깐.”
여대장에게 물과 식량을 산 가토 기요마사의 부장인 가토 키요베에가 수하들과 함께 그들을 세웠다.
“밤이슬이 차거늘…. 벌써 가시려는가?”
“아이고. 장군님. 덕분에 이놈의 모진 목숨이 또 하루 늘었습니다요. 헤헤. 그럼 안녕히….”
“챙”
키요베에와 부하들이 칼을 뽑았다.
“왜들 이러십니까? 아까. 수비대장께옵서 목숨은 보장해 주신다고….”
“응? 금시초문인걸. 흐흐”
날을 잘 버린 왜장의 검이 여여문의 목에 살짝 닿자 붉은 생체기를 내었다.
“감히. 우리 군을 그깟 물과 쌀로 농락해?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듯싶으냐?”
그의 협박에 여대장의 얼굴은 비굴한 파락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진중한 장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날 베면, 이 성의 무고한 병사들과 부역자들을 구할 기회는 없어진다. 그래도 좋다면 처라!”
“뭐라? 이런 무엄한 놈 같으니라고….”
겁박에 당당히 맞서는 여여문의 말이 그의 화를 돋우었다. 가토 키오베에는 검을 높이 들어 그의 목을 내려치려 했다.
잠시 후. 여여문과 명국 상인들이 왜성을 빠져나왔다. 달빛이 그들의 귀환을 환영해주었다.